“언론에 노출된 데 책임 통감해 …”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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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노총의 성폭력 사건을) 유출한 사람을 민주노총에 알려달라. 더 이상 민주노총의 권위와 명예가 훼손되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엄중히 말씀드린다.”

민주노총 지도부가 9일 총사퇴하며 이렇게 말했다.

민주노총 간부의 성폭력 사건과 관련해 민노총 지도부 전원이 사퇴했다. 9일 서울 영등포 사무실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진영옥 위원장 직무대행이 이석행 위원장이 쓴 사퇴서와 조합원들에게 보낸 편지를 들고 있다. [김태성 기자]


민주노총 이석행 위원장 명의로 된 ‘기자회견문’에서 “이번 사건으로 충격과 실망, 분노하고 있을 국민과 조합원에게 진심으로 머리 숙여 사과드린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이 사건을 5일 처음 보도한 중앙일보와 경향신문에 포문을 열었다. “중앙일보와 경향신문이 피해자의 개인정보를 함부로 노출시키는 등 2차 가해를 자행했다”고 주장했다. 이어 “언론 노출에 대한 책임을 통감하며 총사퇴를 결정했다”고 덧붙였다. 인권실천시민연대는 5일 기자회견에서 “언론 보도에 피해자의 이름이 나간 것도 아니고, 문제 삼을 점을 찾지 못했다”고 말했었다.

이날 사퇴한 민주노총 지도부는 향후 꾸려질 비상대책위원회에 언론 유출자를 색출하기 위한 진상조사위원회 설치를 요구키로 했다. 민주노총은 “2차 가해(유출)를 직접적으로 자행한 당사자를 가려내지 않으면, 익명성과 취재원 보호라는 보호막 속에 숨어서 또다시 2차 가해를 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설명했다. 이번 사건이 불거진 책임을 보도한 언론 탓으로 돌리고 있는 것이다.

고려대 김동원(경영학) 교수는 “심각한 범죄에 대한 철저한 자기반성이 우선돼야 하는데, 떠넘기기식 사퇴의 변이 나온 것은 유감”이라고 말했다.

인권실천시민연대가 기자회견에서 집중 제기한 위증 강요와 은폐 의혹에 대해서도 민주노총 지도부는 강하게 부인했다.

사퇴한 지도부는 “(이 위원장 도피 과정에 대한) 위증을 강요했다거나 피해자 혼자 책임지라는 식의 무책임한 행위를 한 사실이 없다”고 말했다. 인권실천시민연대는 5일 “(이 위원장 도피 과정에 대해 피해자에게 허위 진술을 강요한 것은) 범인 도피죄와 관련해 범행 일체를 피해자 혼자 책임지라는 차원에서 나온 매우 부도덕한 행위”라고 지적했었다.

사건 은폐 의혹에 대해서는 “본의 아니게 사건 처리가 늦어진 점은 인정하지만 결코 사건을 은폐하거나 가해자를 옹호하려는 의도는 없다”고 해명했다. “조속히 이 사건을 처리하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했다고 감히 말씀드린다”고 덧붙였다.

익명을 요구한 노동계 인사는 “사과의 진정성이 보이지 않는다. 해명인지, 변명인지 구분이 안 간다. 국민의 더 큰 반감을 부르지 않을지 우려된다”고 말했다.

인권실천시민연대 오창익 사무국장은 “민주노총이 이번 사건과 관련해 자꾸 말을 바꿔 진의를 모르겠다”며 “피해자에 대한 (민주노총의) 위증 강요와 사건 은폐 의혹이 있었다는 입장에 변화가 없다”고 말했다. 오 사무국장은 또 “검찰에 오늘(9일) 고소장을 접수했고 민주노총에 대해서는 조만간 입장을 다시 한번 밝히겠다”고 덧붙였다.

한국노동연구원 김정한 연구위원은 “1995년 출범 이후 민주노총의 네 차례 지도부 총사퇴 중 두 차례(98년, 2002년)는 지도부가 사회적 합의에 동참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이는 민주노총의 강경투쟁 기류를 보여준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여기에다 최근 몇 년 새 잇따라 도덕성에 치명상을 입어 민주노총이 여론의 지지를 받기는 더 힘들 것”이라고 말했다.

◆정치권 비판 이어져=민주노총에 대한 정치권의 비판이 이어지고 있다. 한나라당은 8일 부대변인 논평을 통해 “이미 민주노총은 2005, 2006년 산하 자동차 노조들의 비리와 수석부위원장의 금품 수수 사건으로 도덕성에 치명타를 입었으나 다시 고질적인 도덕 상실증을 드러냈다”고 지적했다. 자유선진당 박선영 대변인도 9일 논평을 내고 “도덕성이 결여된 노동조합은 변종 정치집단에 불과할 뿐”이라며 “민주노총은 이번 사건을 도덕성 회복의 전기로 삼아 환골탈태해야 한다”고 밝혔다. 민주노동당은 언론 보도가 나온 하루 뒤인 6일 “민주노총은 가해자를 일벌백계로 다스려야 한다”면서도 “이번 사건이 민주노총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근거로 악용돼선 안 된다”는 짧은 논평을 냈다. 진보신당이 5일 사건이 알려지자마자 “민주노총은 물론 운동사회 전체의 도덕성과 직결된 문제”라며 대국민 사과를 촉구한 것과 대비된다.

김기찬·장정훈·백일현 기자 , 사진=김태성 기자

민주노총 지도부 총사퇴 일지

① 1998년 2월 배석범 위원장 직대 사퇴

- 외환위기 극복 위한 노·사·정 대타협 동참에 대한 내부 반발

② 2002년 5월 허영구 직무대행 사퇴

- 발전산업노조 파업 종결 위한 노·사·정 합의문 서명에 대한 내부 반발

③ 2005년 10월 이수호 위원장 사퇴

- 강승규 수석 부위원장의 금품수수 사건에 대한 책임

④ 2009년 2월 이석행 위원장 사퇴

- 핵심 간부의 성폭력 사건에 대한 책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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