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시인들은 왜‘세한도’에 빠졌을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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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유안진씨(左)와 이근배씨가 추사 김정희의 작품을 감상하기 위해 6일 서울 용산 국립중앙박물관을 찾았다. 두 시인은 “추사는 절망적인 상황에 굴하지 않고 걸작 ‘세한도’를 남겼다”며 “그의 그런 예술혼에 반하지 않을 시인은 아마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김성룡 기자]

 “내 시간의/저 위쪽//추사가 살아 있었다는/그 일 하나만으로도//37도의 이 무더위가/아무렇지도 않다//추사/가을의 역사”(김지하 ‘추사’ 중).

추사 김정희(1786∼1856)와 그의 대표작 ‘세한도(歲寒圖)’를 소재로 한 시인 53명의 시 63편을 모은 『시로 그린 세한도』(과천문화원)가 최근 출간됐다. ‘문단의 마당발’로 통하는 시인 이근배(69)씨가 그동안 추사와 ‘세한도’를 기린 시가 유난히 많이 창작됐다는 데 착안, 수작들을 모아 펴낼 것을 제의해 이뤄졌다. 시집에 이름을 올린 시인에는 이씨 외에 오세영·서정춘·유안진·정희성·조정권·정호승·황지우·곽재구·도종환씨 등이 포함됐다.

똑같은 소재를 다뤘지만 시집에 실린 시편들은 빛깔과 울림이 제각각이다. 앞서 인용한 김지하의 시는 학문과 예술을 일치시키려 했던 추사의 일생에 주목한 듯하다. 중국의 명필들을 앞섰던 서예 실력, 북청 유배 중에도 진흥왕 순수비를 찾아낸 학자로서의 집념 등 추사의 재능과 행적을 따라간다.

‘사평역에서’의 시인 곽재구는 조합신문에 시가 소개된 날 작업반 친구들과 소주를 마시다가 달동네 전세방에서 뜨개질하고 있을 “풀내 나는 아내”를 떠올리고는 결혼식조차 올리지 못한 이 땅의 모든 가난한 부부를 노래한다(‘세한도’). 황지우는 겨울철 아파트 거실 유리창 벽면 전체를 유리로 표구한 ‘세한도’로 보는 상상력을 보여준다(‘유리 끼운 세한도’).

이근배씨와 유안진(68)씨로부터 왜 추사 김정희의 삶과 작품이 오늘날 시인들로 하여금 시를 쓰게 만드는지 이유를 들어봤다. 두 시인은 6일 오후 서울 용산 국립중앙박물관 서예실을 찾아 추사가 쓰던 벼루, 서첩 등을 감상하며 이야기를 나눴다.

◆시인들, 왜 추사에 빠지나=추사는 성리학의 권위가 흔들리던 조선 후기, 고증학으로 대표되는 북학(北學)을 수용할 것을 주장한 현실 정치인이었다. 25세 때 청나라 학계의 거물 옹방강으로부터 “해동 제일의 문장”이라고 극찬받는 등 금석학·시·서·화 등 다방면에서 조선의 울타리를 벗어난 글로벌 지식인이었다. 특히 ‘세한도’는 그림에서 문자향·서권기가 느껴져야 한다는 추사 특유의 화론(畵論)이 녹아든 걸작으로 평가받는다. 권력 지향적인 당시 세태를 날카롭게 비판한 발문(跋文·작품 제작 경위와 가치를 논한 글)을 이어붙여 이름 높다.


유안진씨는 “‘세한도’는 ‘추운 계절을 그린 그림’이라는 뜻이지만 여기서 추위는 단순한 계절이 아닌 엄혹한 세태를 말한다”고 풀이했다. “추사는 제주도에서 9년, 북청에서 1년 등 중년 이후 유배 생활이 이어졌던 반체제 인사였기 때문에 ‘세한도’를 그릴 당시 언제 사약이 내려올지 모르는 절망적인 상황이었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추사는 작품 제작에 몰두해 ‘세한도’를 남겼다.

유씨는 “시인은 세상으로부터 고립을 자초하는 유배의식을 가진 존재”라고 정의했다. 또 “춥고 서럽고 억울하고 분통 터지면서도 한 편의 시 쓰기에 매달린다”고 했다. 그런 면에서 추사의 삶과 예술에 대한 태도가 시인들에게 하나의 본보기가 되기 때문에 추사에 빠져들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씨는 “한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추사는 70년간 벼루 10개를 갈아서 바닥내고도 편지글 하나 익히지 못했다고 겸손해했다”며 “그런 준엄한 자기 점검을 떠올리면 시 쓰는 게 부끄러워질 정도”라고 말했다.

신준봉 기자 , 사진=김성룡 기자

◆세한도(歲寒圖)=추사가 제주도 유배 5년째인 1844년 진귀한 중국 책을 구해 보내준 제자 이상적에게 선물로 그려줬다. 23.7X1388.95㎝. 국보 180호. 초묵(焦墨·짙은 먹물)만을 사용해 한겨울에도 푸른 소나무·잣나무의 고고한 절개를 표현해 문인화의 진수로 평가받는다(그림下·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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