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화하는 진화론, DNA 발견 후 혁명적 변화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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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호 22면

찰스 다윈 탄생 200주년을 앞둔 1월 하순, 한국에선 사이코패스 강호순의 연쇄살인 사건으로 떠들썩하다. 살인범의 범행은 과학수사팀의 유전자 감식으로 밝혀졌다. 이는 1나노그램(ng·10억분의 1g)의 DNA로 가능했다. 다윈 진화론의 후예들이 이뤄낸 쾌거였다. 오늘날 진화의 단위는 유전자로 압축되고, 유전정보를 담은 DNA는 진화론을 이해하는 열쇠다. 다윈은 유전자라는 개념을 몰랐지만 진화론은 유전자 발견으로 과학성을 확고히 다졌다.

150년 전 '종의 기원'이 출판된 뒤 진화론은 후학들에 의해 ‘진화’를 거듭했다. 다윈은 비글호를 타고 갈라파고스 제도의 핀치 새를 관찰하고 아르헨티나의 화석들을 통해 자연선택과 변이의 영감을 얻어냈다. 이후 150년 동안 후학들은 진화론의 공백 부분을 채워 나갔다. 이들은 생명체의 기원과 작용을 탐구 대상으로 삼는다.

자연선택에 기초한 다윈의 진화론은 1930~40년대 전환점을 맞이한다. 서로 대치되는 길을 걸어온 생물학자·집단유전학자·고생물학자·고박물학자들이 진화론을 현대적 의미에서 재정립한 것이다. 이들은 “격리된 개체군이 자연선택과 기타 메커니즘에 의해 점진적으로 변이가 축적되면서 새로운 종이 탄생하는 것”이라는 결론을 냈다. 다윈학사(史)에서는 이때를 자연선택 이론의 부활 시기, 또는 신(新)다윈주의가 성립한 시기라고 정리한다.

진화론이 날개를 얻은 것은 다윈 시대에 움트기 시작한 유전학의 발달 덕택이다. '종의 기원' 발표 후인 1865년 모라비아(현 체코)의 수도사 그레고어 멘델은 완두콩 실험 연구를 통해 선대(先代)의 유전형질이 섞이지 않고 독립적으로 후대에 전해짐을 입증했다. 그러나 그의 실험은 주목받지 못했다. 다윈도 같은 시대에 살던 멘델의 연구 성과를 알지 못했다.

1892년 아우구스트 바이스만은 세포핵 속에 들어 있는 염색체의 ‘생식질’이라는 물질이 유전형질을 결정짓는다는 사실을 입증했다. 1915년 토머스 모건은 초파리 실험에서 염색체에 유전자가 존재하며 이것이 후대에 전달된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1953년 다윈의 모교인 영국 케임브리지대에서 20세기 후반 최대의 과학 업적 중 하나로 일컬어지는 연구 성과가 나왔다. 물리학자 출신의 생물학자 프랜시스 크릭과 미국인 생물학자 제임스 웟슨이 인간의 유전정보가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복제되는 과정을 밝힌 것이다. 이들은 DNA가 이중(二重) 나선 구조로 돼 있고 아데닌·티민·구아닌·시토신 등 네 가지 염기가 결합해 유전정보를 전달한다는 점을 규명했다. 크릭은 “DNA 구조를 밝혀낸 순간 흥분을 참지 못한 나머지 대학 구내식당으로 뛰어들어가 ‘우리가 생명의 신비를 알아냈다’고 소리쳤다”고 회고했다.

유전학이 전진하고 있을 때 다윈의 후예들은 진화론을 둘러싸고 신학·과학·인문학을 망라한 팽팽한 논쟁을 거듭했다. 대표적인 맞수가 진화생물학의 거장 스티븐 제이 굴드와 리처드 도킨스였다. 굴드는 짧게는 수백만 년에 걸쳐 서서히 진화가 일어난다는 ‘점진설’에 반기를 들었다. 그는 “진화는 어느 순간 갑자기 일어난다”고 주장했다. 오랜 기간 안정을 유지하던 어떤 종이 고립된 상태에서 진화한 근연종으로 갑자기 대체된다는 것이다.

반면 도킨스는 자연선택이 가장 중요한 진화적 변화의 요인이고 점진적 변화를 통해 생명의 전 역사를 설명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도킨스는 '이기적인 유전자''만들어진 신'을 통해 뜨거운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진화론 대 창조론’ 논쟁도 재연됐다. 그는 긴 진화의 역사에서 개체는 잠시 나타났다 사라지는 덧없는 존재라면서 모든 생명체는 유전자가 스스로를 보호하고 후세에 전달하기 위해 만들어 낸 갑옷과 같은 보호 장신구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다. 그는 무신론자의 과학적 이론 틀을 제공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다윈은 ‘현장’을 중시했다. 후학들도 마찬가지다. 피터 그랜트 부부는 73년부터 20년 넘게 다윈이 영감을 얻었던 갈라파고스 제도에서 ‘다윈의 핀치 새’를 관찰했다. 그들은 섬의 기후 변화 등에 따라 변이가 ‘실시간’으로 일어나고 있음을 입증했다. 최근 유전학자들은 핀치 새 부리의 모양이 뼈 형태 형성에 관여하는 BMP4 유전자에 의해 결정된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인간이 언어를 배울 때나 새가 지저귀는 법을 배울 때 언어 구사 능력을 좌우하는 유전자(FOXP2)가 작용한다는 사실을 밝혀낸 것이다. 2003년엔 인간 지놈(유전체)의 30억 개 염기서열 지도가 완성됐다. 유전자 세계에선 초파리나 침팬지가 인간과 똑같이 존엄한 개체로 인정받는다.

이렇게 발달한 생명공학 산업은 질병 치료제의 개발, 범죄 과학수사, 식량 증산 분야에서 새로운 지평을 열고 있다. 다윈의 진화론은 현대 과학과 철학사의 패러다임을 바꿨다. 21세기 들어 다윈의 후학들은 생명공학과 심리학·미학·사회학 각 분야에서 자신의 길을 걷고 있다. 진화론의 영역은 무궁무진하게 뻗어 나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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