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중앙 시평

소통의 동맥경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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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소크라테스는 알고서 잘못을 저지르는 사람은 없다고 말했다. 누구나 어떤 행위가 잘못이라는 것을 안다면 행하지 않으리라는 이야기다. 순진한 걸까? 고대 그리스에는 요즘 엽기적인 연쇄살인으로 전국을 시끄럽게 만든 강호순 같은 사람이 없었다는 걸까? 물론 그건 아니다. 자신의 행위가 잘못임을 분명히 알면서도 죄를 저지르는 사람은 언제, 어디에나 있었을 것이다. 소크라테스가 말하고자 한 것은 도덕이다. 그는 도덕을 안다면 누구나 도덕적으로 살아가게 된다고 말한 것이다. 그러므로 소크라테스의 처방에 따르면 강호순 같은 살인범에게는 도덕을 가르쳐야 한다. 현대적 징벌 체계로 말하면 ‘교화’가 될 것이다.

결국 소크라테스의 해법은 주지주의다. 지식(도덕도 지식이다)이 지배하는 사회라면 만사가 합리적으로 돌아가리라는 주장이다. 계몽적 낙관주의이긴 하지만 아주 틀린 이야기는 아니다. 단, 그 해법이 통하려면 지식이 늘 올바로 소통돼야 한다는 전제가 필요하다. 누구나 동의할 만큼 객관적이고 합리적인 지식이 존재한다고 가정하더라도 소통되지 못하면 꿰지 못한 서 말의 구슬일 뿐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현대사회의 한 특징은 소통이 꽉 막혀 있다는 점이다. 대화에서는 물론이고 심지어 한 개인의 의식 속에서도 소통이 원활하지 못하다. 강호순의 진짜 문제는 도덕이 아니라 소통에 있다.

현대는 소통의 매체가 고도로 발달했지만 실은 근원적인 소통이 어려운 사회다. 그 이유는 소통을 원활하게 하는 매체의 발달에 못지않게 소통을 가로막는 체계적인 구조도 발달하기 때문이다. 이 점은 텍스트의 생산과 해석에서 드러난다. 현대사회에는 항상 해석이 필요한 텍스트들이 흘러넘친다. 물론 누구나 금세 의미를 알 수 있는 텍스트도 있다. 예를 들면 좌회전 신호를 다른 의미로 해석하는 운전자는 없다. 건조한 법조문이나 실용적인 의사의 진단서도 의미가 단순하고 명확한 텍스트다. 판결문이나 처방전에 문학적 기교를 부려 다른 해석의 여지를 남기는 판사나 의사는 없을 테니까.

하지만 모든 텍스트에는 그것을 둘러싼(con) 배경, 즉 콘텍스트가 있다. 이것이 텍스트와 겉돌면서 때로는 숱한 해석을 낳고 소통을 어렵게 만든다. “그래, 너 잘났다!” 대화 도중에 화가 난 사람이 이렇게 쏘아붙인다. 그 말을 들은 사람은 당연히 항의한다. “왜 그 따위로 말하나?” “네가 잘났다는데 뭐가 어떻다는 거야.” 너 잘났다는 말을 듣고 정말 내가 잘나서 저렇게 말하는구나 하고 착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잘났다”는 말은 드러난 텍스트일 뿐이고, 그 배후에는 “잘난 척하지 마라”는 콘텍스트가 숨어 있다. 여기서 화자의 진의는 텍스트가 아니라 콘텍스트가 전달한다. 말하는 사람도, 듣는 사람도 다 안다.

그럼 “잘난 척하지 마라”는 말을 그대로 전달하지 않고 반어적으로 한 번 꼬는 이유는 뭘까? 그건 텍스트를 그대로 전달하는 것보다 콘텍스트에 숨겨 전달하는 게 훨씬 상대방을 비난하고 자극하는 데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네 기분을 긁어놓겠다, 한번 붙자는 의미에 다름 아니다. 이것은 일상적인 상황이지만 놀랍게도 이 유치한 메커니즘이 현대사회의 거의 모든 소통에 개재된다.

용산 참사를 놓고 벌어지는 여야의 말씨름도 마찬가지다. 여당은 이 사태의 근본 원인이 정부의 대책 없는 재개발 정책과 경찰의 무리한 진압에 있다는 콘텍스트를 의도적으로 숨기고, 폭력적 시위문화가 원인이라는 텍스트를 내놓는다. 야당은 한심하고 무능한 정부라 해도 국민을 위해 노력한다는 콘텍스트를 의도적으로 숨기고, 정부가 국민의 기본권을 무시한다는 텍스트를 채택한다. 둘 다 한판 붙자는 의사를 한 번 꼬아서 표현의 극대화를 노리는 것이다. 싸우자는 의도를 깔고 있기에 대화와 타협은 애초에 없다. 서로 게임의 룰을 다 알면서 모르는 척하기 때문에 게임이 치졸해진다.

이 소통의 동맥경화는 의도적인 것이기에 풀기 어렵다. 독일의 사회학자 하버마스는 현대사회의 의사소통이 체계적으로 왜곡돼 있다고 본다. 하지만 진단은 옳아도 처방은 소박하다. 그는 의사소통을 왜곡하는 장애물들을 차근차근 제거해 나가면 투명한 소통로를 확보할 수 있다고 믿었지만, 소통의 필요성 자체를 느끼지 못하는 사회적 분위기라면 그건 해법이 되지 못한다. 알고서도 잘못을 저지른다. 소크라테스의 도덕이 힘을 잃는 것과 마찬가지다. 소크라테스와 하버마스는 혹시 우리 사회를 총체적 사이코패스라고 보지 않을까 싶다.

남경태 역사 및 철학 저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