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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쟁> '母性' 여성차별의교묘한 도구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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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이 세상에서 여성이 몽땅 살림을 거부한다면,아니 그것보다 여성이 몽땅 출산을 거부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아마도 인간 역사의 변혁중 가장 큰 변혁이 일어날 것이다.

종래의 가족공동체나 노동시장뿐 아니라 국가도 재편성돼야 할 것이다.이런 현상은 지금 서구 선진국에서 서서히 진행되고 있으며 우리 역시 이 변혁의 화살을 피하지 못할 것이다.

인류역사는 두개의 기둥,즉 남성의 상품생산노동과 여성의 인간생산노동에 의해 지탱되고 번영해 왔다.상호의존적인 이 두 기둥중 하나가 없으면 다른 하나는 버틸 수가 없다.

그러나 인간 역사의 기초가 되는'인간생산노동'은 개개인의 사적인 일이거나 여성의 서비스 정도로 평가절하돼 버렸다.그래서 여성은 생물학적 약자로,경제적 의존자로,사회적 열등자로 격하됐다.직업과 수입의 고저에 의해 인간값이 매겨지는 자본주의사회에서 주부와 모성은'직업'도'수입'도 없는 빈곤과 억압의 상징에 지나지 않는다.

4인 가족을 책임진 주부의 1년 노동량은 엄청나다.2만개의 접시를 닦고,2만평의 집공간을 청소하며,5천㎞ 살림보행을 하고,2천시간의 살림노동을 수행하면서도 주부는'아무일도 안하고 집에서 논다'는 평가를 받는다.이런 상황을 혹자는 가리켜 노예가 해방된 오늘의 민주사회에서 가장 민주적인 방법으로 무한정 착취되고 있는 주부는'불가시적 봉사계급'이라고 꼬집기도 한다.

여성들이 사회에 참여하려고 할때는 차별적인 노동시장이 기다리고 있다.취업시 직종제한과 저임금,승진과 재교육 기회의 차별등 불경기엔 먼저 해고되고,호경기라도 맨나중에 고용된다.

가정에서는 무임노동,사회에서는 차별노동을 견디면서 가족생계와 자아실현을 펴보고자 하는 여성들에게 국가는 무엇인가.국가가 친정이 아닌 시집행세를 한다면 과장일까. 집안일,직장일 이중삼중 짐을 어깨에 지고 있는 여성에게 살림지원체계나 탁아소마저 후진적 상황이다.

이렇게 남편의 도움과 사회의 지원체계 없이 차별적인 노동시장에서 버티다가 드디어 백기를 들고 항복하고마는 곳이 모성이 찬양되는 가정의 품이다.모성이란 스스로 먹이가 돼 자기권리를 포기함으로써 찬양되고 칭찬받는다.

오직 봉사에 의해서만 자리가 확보되고 예속에 의해서만 지위가 승인되는 자리일 뿐이다.여기에서 바로 중산층 여성의'주부병'이 싹튼다.모성찬양이 차별인 줄 모를 때 주부병은 시작된다.

사실 여성은'모성'을 통해 인간적인 모습을 유지할 수 있었다.그것은 모성안에는 풍부한 창조성과 기쁨의 잠재력이 내재돼 있고,무한한 사랑과 무한한 에너지의 보고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생명에 대한 열정과 용기,생명을 위해 바치는 헌신과 인내.관용.눈물과 부드러움이 아니었더라면 어떻게 인간생명은 오늘까지 유지.보존될 수 있었을까.이를 부인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성들의 지고한 모성이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가부장적인 관점에서 여성에 대한 억압의 도구로 교묘히 악용돼 온 것은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이다.가부장제의 사슬이 끊어지지 않는 한 여성에게 요구되는 모성이란 희생과 사랑의 이름으로 포장된 억압이라는 것을 여성들은 냉철히 깨달아야 할 것이다. 손덕수 효성가톨릭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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