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기 눈물’보다 적은 양의 DNA가 희대의 살인범 잡았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05면

“모기 눈물보다도 적은 분량이었다.”

국립과학수사연구소 한면수 유전자 분석과장은 연쇄살인범 강호순(38)의 점퍼에 남아 있던 혈흔(핏자국)에서 채취한 DNA(유전자)를 이렇게 표현했다.

미제 살인 사건을 다룬 영화 ‘살인의 추억’을 연상케 하는 강의 연쇄살인 행각은 DNA 감식 기법으로 그 실체가 드러났다. 그의 리베로 차량 속 점퍼에서 혈흔이 발견됐고, 혈흔의 DNA가 지난해 11월 수원에서 실종된 김모(48)씨의 것으로 확인되면서다. 경찰이 강의 검은색 점퍼를 국과수에 넘겨 유전자 감식을 의뢰한 지 하루 만이었다.

강은 자신의 차량 두 대를 불태우는 등 치밀한 방법으로 범죄 흔적을 없앴지만 추가 범죄 행위가 들통난 건 1ng(나노그램, 10억분의 1g)도 안 되는 분량의 DNA 때문이었다.

◆두 달 반 지난 핏자국이 단서=28일 오후 강호순의 차 안에서 발견된 검정 점퍼가 국과수에 도착했다. 지난해 11월 9일 범행 당시 입었던 검은색 점퍼로 수사의 실마리를 풀어줄 단서가 있는지를 확인해 달라는 것이었다. 유전자 분석사인 임시근(40)·엄용빈(39) 연구사는 점퍼를 유전자 분석동으로 옮겨 옷 전체에 루미놀(혈흔 감식용 화합물)을 뿌렸다. 그러자 점퍼 오른쪽 소매 끝부분에서 푸르스름한 형광빛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눈으로는 보이지 않던 핏자국이었다. 강호순 자신도 핏자국이 묻었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할 정도였다.

연구사들이 이 부분을 조심스럽게 면봉으로 닦아냈다. 핏자국에서 DNA를 추출하기 위한 첫 단계였다. 면봉을 튜브에 담고는 DNA 분리용 시약을 처리해 꼬박 12시간을 기다렸다. DNA는 유전자 증폭기(PCR)로 보내졌다. 유전자 증폭기는 소량의 DNA를 분석이 가능할 정도의 양으로 늘려주는 기계다. 3시간30분이 지나자 DNA 양은 10억 배로 늘어났다.

이렇게 늘어난 DNA를 자동 유전자형 분석 장치에 넣었다. 한 시간 정도 지나자 수치화된 결과가 컴퓨터 모니터에 떴다. DNA의 염기서열 중 13개 구간의 반복패턴을 분석한 수치들이다. 이 13개 수치가 완벽히 일치하면 동일 인물로 판정한다. “일란성 쌍둥이가 아니라면 13개 지표 중 한 곳만 어긋나도 다른 인물로 판단한다”고 임 연구사는 설명한다. 이때 이상한 점이 발견됐다. 13개 중 첫 번째 지표인 성별을 나타내는 표지가 ‘XX(여성)’로 나왔다. 가장 최근 군포에서 희생된 여대생 안모(21)씨의 유전자형과 대조했다. 하지만 일치하지 않았다.

자료실에서 실종자들의 유전자 자료를 찾아 비교했다. 자료실에는 실종자들의 유전자형이 보관돼 있다. 지난해 11월 실종된 주부 김씨의 DNA는 사용했던 칫솔에서 추출, 보관 중이었다. 김씨의 것과 대조해 본 결과 13개 지표의 수치가 모두 일치했다. 순간 임 연구사의 몸에 소름이 쫙 돋았다. 29일 오후 6시쯤이었다.

국과수는 즉시 이를 경찰에 알렸고 여죄를 완강하게 부인하던 강호순은 첨단 수사기법 앞에 무릎을 꿇고 말았다. 임 연구사는 “모든 범죄에는 DNA가 남는다”며 “자신도 모르는 곳에 자신의 DNA가 남아 범죄 사실을 증명하는 결정적 역할을 하게 된다”고 말했다.

국과수가 유전자 감식으로 결정적 증거를 확보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동안 실종되거나 살해된 사람들의 유전자형을 분석해 데이터 베이스(DB)화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작 전과자의 유전자형은 DB화돼 있지 않다. 인권 침해의 논란이 있어서다. 한 과장은 “세계 70개국에서 ‘범죄 유전자 은행’을 만들어 국제범도 잡고 있지만 우리나라만 관련 법이 없어 범죄를 다시 저지른 후에야 유전자를 감식해 대조할 수 있다”고 말했다.

◆“개인마다 DNA 다 달라”=DNA는 세포가 있는 부위면 모두 채취할 수 있다. 주로 혈액이나 머리카락·침 등에서 추출한다. 양은 10억분의 1g만 있어도 된다. 부패해서 혈액이나 침이 남아 있지 않은 시체는 뼛속의 세포를 채취해 쓴다.

한국생명과학연구소 유향숙 박사는 “DNA를 구성하는 염기서열의 반복패턴은 사람마다 각기 다르다”며 “반복패턴을 비교하면 동일인인지 확인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사건 현장에서 제대로 된 시료를 찾기는 쉽지 않다. DNA가 든 물질이 불에 타거나 물에 씻겨 내려간 경우가 적지 않다.

국내에선 1990년대 초반 국과수와 검찰이 범죄수사에 활용하기 시작했다. 서울대 의대 이윤성 교수는 “국제적으로 유전자 감식의 기술력 차이는 크지 않다”며 “국내 기술이 더 인정을 받고 있다”고 말했다.

글=김경진 기자, 사진=김상선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