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의눈>續 對北식량지원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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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강폭이 좁고,깊이도 무릎 정도인 두만강 한가운데 목이 달아난 시체 한구가 고정돼 있었다.바로 지호지간(指呼之間)에 북한 병사와 동포들의 움직임은 무심했다.또 다른 두만강변에는 한 깡마른 여인이 햇살을 받으며 주위의 시선엔 아랑곳하지 않은채 웃통을 벗고 이를 잡고 있었다.내륙의 어떤 민가에선 풀에다 밀가루 한숟가락으로 만든 희멀건 풀죽 한 그릇으로 끼니를 때우고 있었다.22일 저녁 KBS 일요스페셜'지금 북한,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나'의 보도프로가 보여준 장면들이었다.

북녘동포들의 간난(艱難)이 고스란히 드러난 이 프로는 물론 새삼스런 뉴스로 채워진 것은 아니었다.중앙일보를 비롯한 언론매체들이 이미 오래 전부터 북녘동포들의 실상을 소개해 왔고 또 그 문제의 심각성을 누누이 지적해온 연장선상에 그 프로는 있었다.다만 화면과 육성의 증언이 눈과 귀로 바로 전해져 가슴을 한층 뒤흔들었다.

이 프로를 시청한 후 내 마음속에 일어난 여러가지 상념중에 가장 마음을 어지럽힌 것은 다름아닌“국가가 지금 인민들을 다 죄인으로 만들고 있다”는 한 북녘동포의 육성이었다.국민을 먹여 살리지 못한 국가가 죄없는 인민을'도적질하지 않으면 안되게'내몰고 있다는 눈물어린 항변이었다.이는 다른 말로 하면 민심이 국가로부터 떠났다는 얘기나 다름없다.한 어린이의 증언이 이어진다.“(식량배급을)'한달만 참아라,한달만 참아라'(라고 말하지만) 거짓말이다.” 김정일(金正日)에 대한 신뢰의 위기가 현재화(顯在化)한 증언이다.국가와 지도자에 대한 신뢰의 위기는 엉뚱하게 남북전쟁론으로 이어져 심각성을 더해준다.“이래도 죽고,저래도 죽고 이제 수는 뭐인가…전쟁해서 이기면 먹을게 생기는 거고,지면 죽는 건데 어차피 굶어죽으니까 전쟁하자는 거는 한결같은 인민들의 의견이다.”남한의 북침준비 때문에 군비를 증강하느라 북한이 피폐해지고 있다는 북한 지도부의 대민(對民)심리전이 먹혀든 현상의 발로다.

여기에서 우리 정부의 대북정책이 혁신적으로 대전환해야 하는 이유가 나온다.북녘동포의 마음을 얻는 우리의 전략이다.대북 식량지원을 대규모로,그것도 조건없이 즉시 실시함으로써 북한의 지도부와 인민을 분리시키는 것이다.

혹자는 이렇게 하면 지도부만 도와주는 것이 아니냐고 반문할지 모른다.그런 우려가 단순한 기우(杞憂)만이 아님은 물론이다.

그러나 지금은 비상시다.북녘 유아사망률이 2년전 보다 근 두배 늘어났다는 유엔 보고서도 나오는 등 기아의 위험은 현존하는 긴박한 위기상황이다.다량의 식량이 북한에 들어가면 북한이 아무리 주민들에게 거짓으로 둘러대더라도 남한의 제공사실은 곧 북한 전역에 유포될 것이다.북녘동포가 이를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자명하다.

김정일의 전쟁론에 대한 회의(懷疑)와 함께 남녘정부와 동포에 대한 그들의 기존관념이 허물어질 계기는 충분히 제공될 것이 아닌가.우리가 평화적이고 민주적 통일을 지향하고 이를 이루자면 북녘동포의 마음을 얻어야 한다.그 첩경이 지금 조성되고 있다고 보면 너무 성급한 논리의 비약(飛躍)일까. 예부터 민심을 얻는 자가 천하를 얻는다고 했다.21세기 우리국가의 최대 과제는 민주적 가치를 바탕으로 한 평화통일의 달성이다.그것을 달성하기 위한 최선의 방책은 남북간의 신뢰조성임은 두말할 것도 없다.지도자간.체제간의 신뢰조성이 어렵다면 우회적이고 다소의 위험과 손해를 감수하는 정책수단도 혁신적으로 동원돼야 한다.더구나 그것이 우리 반쪽의 활인(活人)을 위한 목적이라면 더욱 그렇지 않은가. 대북식량지원이 트로이의 목마(木馬)가 될 것이라고 나는 확신한다.그 트로이의 목마는 누가 이기고 지는 차원이 아니다.21세기 한민족의 평화통일을 조성하는 첫 걸음이기 때문이다.

이수근 편집부국장겸 정치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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