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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신 반대 피고인들 항의에 단체로 판사 그만둘 생각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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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유신 반대를 외치는 피고인들의 항의를 받으며 물러날 생각을 한 적도 있습니다.”

다음달 법원 정기인사 때 35년 판사 생활을 마감하는 오세빈(59·사진) 서울고등법원장이 최근 후배 판사와 법원 직원들에게 ‘회고의 편지’를 보냈다. ‘판사, 그 시작과 끝’이라는 제목의 e-메일을 통해서다.

10월 유신 체제 3년째인 1975년 광주지방법원에서 판사 생활을 시작한 오 원장은 “약하고 여린 마음에 장발 피의자에게는 과료(벌금형보다 낮은 금전적 처벌) 선고를 하고 사정이 딱한 형사범은 영장을 기각해 사사건건 지적을 받기도 했다”라고 회고했다. 그는 “형사 재판 도중 긴급조치와 유신에 반대하는 구호를 외치는 피고인들의 항의를 받으며 ‘우리 모두 물러나자’는 부장(판사)님의 말씀에 따르기로 마음먹은 적도 있다”라고 적었다. 특히 “집시법 위반으로 절친한 친구의 동생이 내 법정에 섰을 때 마음 속 깊이 고민하며 괴로워했다”라고 당시 심경을 전했다.

전두환 정권 시절인 1980년대에도 오 원장을 비롯한 판사들에게는 시련의 시기였다. “법정에서 (운동권 학생들의) 노래 소리를 들어가며 재판했지만 후배인 학생들에게 부드럽게 대하려고 노력했고, 판결도 소신에 따라 했습니다. 어느 여대 총학생회장을 교수님들의 간곡한 요청으로 집행유예로 석방하기도 했습니다.”

오 원장은 “고등법원 부장판사 때는 부패와 선거 사건 재판을 맡아 높은 형량만큼이나 무거운 원성을 들어야 했다”라고 털어놨다. 그는 “나는 줄곧 법정에서 재판을 담당하는 판사였다. (행정직인) 법원장으로 지낸 4년 동안은 어쩌면 내게 어울리지 않는 생활이었는지 모르겠다”라고 적었다. 끝으로 “법관 생활을 마무리하며 나 자신이 정직하고 정의로운 법관이었는지 반성한다”라는 말을 남겼다.

박성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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