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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버性' 앞에 숨죽이는 남편.자식들 - 인터넷 여성정보 거의 상업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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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어머,이게 뭐야?” 무심코 남편 책상을 정리하던 박진경(28.서울강서구화곡동)씨는 PC 옆에 놓인 서류철에서 여자 나체사진으로 만들어진 달력을 발견하고 소스라치게 놀랐다.자세히 보니 요즘 한창 유명한 인터넷 누드모델 이승희다.출처는 금방 알 수 있었다.남편이 업무에 꼭 필요하다며 PC와 컬러프린터를 월부로 들여온지 1주일 남짓.밤마다 컴퓨터 앞에 앉아있길래 일이 그렇게 많은가 싶어 안쓰럽기까지 했는데 고작 이건가 하고 생각하니 화가 치밀었다.퇴근한 남편을 붙잡고 따지자 잠시 당황하던 朴씨의 남편은“일하다 머리 좀 식힐 겸 심심풀이 한 것 갖고 웬 수선이냐”며 도리어 짜증을 냈다.

“사실 그 모델 사진만 봤겠어요? PC통신엔 그런 사진이 천지에 깔려있다던데.” 그를 더욱 한숨짓게 하는 것은 남편이 또 그런 사진을 본다 해도 막을 방법이 없다는 것.“그나마 제가 컴퓨터를 맘대로 다룰 줄 안다면 들킬까봐 조심하겠죠.하지만 남편이 사무용 파일을 잘못 건드리면 안된다고 겁을 주니까 그후로도 컴퓨터 옆엔 잘 가지 않게 돼요.”'열린 정보의 바다'인터넷이 '열린 홍등가(紅燈街)'역할을 대신하는 현상으로 인해 주부들이 앓는 속앓이의 형태는 다양하다.일부 남편들의'눈요기 외도'에 대한 불평은 차라리 귀여운 투정.PC통신에 실린 사진으로 음란물을 직접 제작까지 하는 청소년들도 많지만'컴맹'이 대부분인 중년이상의 어머니들은 속수무책이다.

PC통신을 할 줄 아는 여성들은 또'열린 홍등가'의 직접적인 피해자가 되기도 한다.직장여성들의 경우 일부 몰지각한 남자직원들이 버젓이 음란사이트를 켜놓고 불러 장난치는 식의'가벼운'성희롱을 당하는 것은 예사. 부업정보를 얻으려고 멋모르고 전자우편을 띄웠던 주부 K씨는 상대남성이 유부녀인줄 알면서도 끈질기게 데이트신청을 해오면서 추근덕거리는 바람에 ID를 바꿔야 했던 경험도 있다.

이들 문제의 근원은 현실의 잘못된 성(性)문화가 사이버공간에 그대로 나타난다는 데 있다.“이로 인해 여성을 단순한 성적 대상으로만 보는 왜곡된 성인식이 또 한세대 그대로 물려질 수 있다는 점이 더욱 심각하다”고 여성정보원 김은주(정치학 박사)연구원은 지적한다.

“인터넷에 실린 여성관련 정보는 90%이상이 상업적인 것입니다.이는 정보의 수요과 공급이 남성위주로 돼있기 때문이죠.우리나라만 해도 여성이용자가 일반 PC통신의 경우 20%,인터넷은 10%에 불과하다고 보는데,그럴수록 보다 적극적인 참여를 통해 불균형을 빨리 극복하지 못하면 사이버공간에서도 여성은'제2의 성'으로 다시금 전락할 가능성이 큽니다.” 사이버공간의 뒤틀려가는 성문화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바로 교육에 있다는 것이 관계자들의 공통된 견해.여성단체연합의 이경숙 간사는“기계를 멀리하는 교육을 받아온 우리 어머니세대가 딸들의 컴퓨터교육에 무관심했던 것이 현재의 불균형을 낳은 것”이라며“어머니들이 우선 정보화에 깨어야 한다”고 말한다.최근 미국등을 중심으로 음란물 방지 소프트웨어들도 개발되고 있지만 정작 그 프로그램을 아이들 컴퓨터에 깔아주는 것은 부모의 몫. 음란물을 보는 아이들을 단순히 혼내는 것보다 어머니가 먼저 컴퓨터에 대한 기본지식을 갖추고 관리해주는 것이 보다 효율적일 것은 당연하다.“어머니들이 컴퓨터를 스스로 배우지는 못하더라도 최소한 '컴퓨터는 남자아이나 배우는 것'이란 편견을 없애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나마 위안이 되는 것은 10대나 20대 여성들은 보다 적극적인 자세를 갖고 있다는 점이다.

한국산업인력관리공단의 통계에 따르면 지난해 정보처리1급기사 자격시험 전체합격자가 4천9백54명으로 10년전에 비해 3백20% 증가한 가운데 여성합격자는 1천6백3명으로 4백25%의 증가율을 보였다.

컴퓨터를 사용한 문서나 통계프로그램 작성등의 기본기능으로 만족해하던 상업계열 여고생이나 여대생들의 경우도 현실적인 필요에 의해 보다 적극적으로 정보통신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전공과는 상관없는 것도 하나의 특징으로 그들이 새로운 정보제공자의 자리에 서는 날을 기대해 본다.

김정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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