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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마음속의문화유산>16. 내가 찾아낸 3곳의 소박한 석불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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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미술대학 학생들은 1년에 한번씩 고적답사겸 풍치 좋은 곳을 찾아 3박4일 여행을 다니는데 지금도 여전히 계속하고 있다.근년에 힘이 들어 나는 그만두었지만 그럭저럭 20년 가까이 따라다닌 것같다.그러노라고 전국 안가본데가 없다 할 만큼 다녔는데 그래도 책을 펼쳐놓고 생각해보면 내가 본 것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한 것이었다.

나는 여기 세군데 석불(石佛)을 소개하려고 한다.지극히 사적인 나의 취향이 관계된다는 것을 미리 밝혀둔다.한마디로 소박함이라는데를 겨냥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수안보 쪽에서 한참 들어가면 큰 절터가 있고 돌무더기 속에 이른바 중원 미륵리 석조여래상이라 이름붙은 10가 넘는 석불이 하나 있다.또 익산 고도리(古都里)들판에 두개의 석상이 멋쩍게 마주보고 서 있는데 훈훈한 운치를 자아내고 있다.또 하나는 경주 남산 탑골 꼭대기에 만들다 만 것같은 릴리프(浮彫)가 있는데 거기 새겨진 세 부처들에서는 지극히 높은 아취를 느낄 수 있었다.모두가 소박하고 정감 넘치고 욕심이 없는 모습으로 해서 늘 나의 마음속에 살아 있다.나와는 참으로 인연이 깊은 석상들인 것이다.

세 불상이 갖고 있는 공통된 특성이 있는데 내가 특별히 좋아하는 조형상의 어떤 문제들이다.첫째는 형식에 구애됨이 없어서 우선 보기에 편안한 점이고,둘째는 소박한 품격인데 그래서 사랑스럽고 좋은 친구 만나듯 그냥 옆에 앉아 놀고 싶은 점이 그것이고,또 한 가지는 만든 사람의 솔직성이 나의 가슴으로 직접 파고든다는 점이 또한 그것이다.높은 격조를 나타내려고 욕심냄이 없고 중국을 비롯한 서편 나라들의 양식에 기대서 위신 세우려 함이 없다.으스댐이 없는 것인데 그래서 진정한 우리 민족의 속마음이 솔직하게 드러난 것 같아서 여간 좋은게 아니었다.

꽤나 오래 전의 일이었다.수안보를 지나서 버스는 아름다운 시골길을 달리고 있었다.나는 어디를 가는지 별 관심도 안갖고 차창 밖의 싱싱한 풍경을 바라보고 있었다.한 모퉁이를 지나 학생들 모두가 차에서 내렸는데 그야말로 황성옛터였다.

커다란 불상이 엉성한 기단 위에 서 있는데 돌의 색깔도 어여쁘거니와 그 풍기는 냄새가 순박하고 포근했다.얼굴 표정도 후덕한 시골 아낙네 같고 팔각형 갓이었는가,머리 위에 살짝 얹힌 그 균형감 같은 것을 일러 멋이라 할지… 앞가슴에 가지런히 무언가를 얘기하려는 듯 새겨있는 두 손을 보라,참으로 아름다운 명품이었다.20세기의 대 조각가 누가 만든다 해도 그처럼 신묘한 형상으로 아름다움을 성취하기는 아마도 어려울 일이었다.서민적인 친밀감과 함께 아름다운 격조를 잘 갖추고 있었다.우리는 여러가지로 상상하며 한담을 했지만 그렇게도 사랑스럽고 편안한 부처님 상은 그 뒤로 나는 더 이상 볼 수가 없었다.아쉬운 마음으로 절터를 나오는데 어떤 학생이 다급하게 쫓아와서 이렇게 말했다.지금껏 잊을 수가 없다.“선생님 저 안내 간판좀 보세요.뭐라 뭐라 적어놓고,그런데 졸작(拙作)이다… 이렇게 기록되어 있어요.”'졸작이라면 안내문은 아예 쓰지를 말 것이지'하고 우리는 어이없이 그냥 웃을 수밖에 없었다.지금도 그 안내판이 그대로 서 있는지 아니면 고쳐졌는지 가끔 궁금한 생각이 난다.

널찍한 들판 푸근하게 채워 일행이 익산 지방에 갔을 때였다.그곳 미륵사지탑과 왕궁리탑을 보기 위함이었다.그런데 그 중간쯤 들판에 두 개의 석상이 서 있는데 운치가 참으로 볼만하였다.우리 모두는 차에서 내려 그리로 달려갔다.아무도 그 석상에 대해서 무어라 아는 사람이 없었다.돌장승이라커니 민불(民佛)이라커니 좌우간 그냥 좋아서 사진을 찍고,이쪽으로 저쪽으로 왔다갔다하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4가 넘는 훤칠한 키에 멋있는 모자가 턱 얹혀있는 것인데,그 넓은 들판이 어쩐지 훈훈한 정신공간으로 보이는 것이었다.훗날에야 고려시대 불상이란 것만 확인되었을 뿐 지금도 그 내력을 나는 모르고 있다.돌기둥을 캐다놓고 실로 조금만 깎아서 부처님을 만든 것인데 조선시대로 내려오면서 문인석 또는 당승의 양식으로 계승된 것이 아닐지 그런 생각을 했다.

지금도 잘 납득이 안가는 면이 있는데 어찌해서 그런 엉뚱한 불상의 양식이 생길 수 있었을까 하는 그런 사회분위기가 궁금한 것이다.우리가 그때 민불이라는 단어를 쓴 이유가 바로 그런 배경을 의식하고 떠올린 단어였다.국가적인 큰 사업이 아니고,또 고승 대덕이 창건한 불사가 아닌,이른바 지역 민중의 순박한 정성으로 됐다는 생각에서 그런 것이었다.거대한 미륵사지탑과 귀족적인 미를 아낌없이 발휘하고 있는 왕궁리탑 사이에 그런 조촐한 두 개의 돌기둥 같은 돌부처가,그것도 논 한 가운데에 마냥 서있는 그 모습이 세월이 갈수록 내 머리 속에서 점점 더 크게 자라나고 있는 것이다.참으로 신기한 일이다.

사진작가 강운구 선생이'경주 남산'이라는 사진집을 만들었다.그 첫쪽부터 내가 지금 얘기하고자 하는 남산 탑골의 조각들이 실려있다.장장 30쪽이 넘는 분량을 할애하고 있다.남산의 이미지를 탑골을 정점으로 삼은 것이었다.며칠전 오랜만에 그와 만나 그 이야기를 하였다.어쩌면 나하고 생각이 그렇게도 일치할 수 있을까! 우리가 남산을 찾은 것은 꽤나 오래 전의 일이었는데 조소과 학생 거의 전원이 참가했고 경주에서 이름난 윤경렬 선생을 안내인으로 모신 쾌사였다.아침부터 저녁까지 하루를 완전히 답사계획으로 잡고 도시락을 지참해 중턱에서 점심을 했다.

그때 일을 생각하면 지금도 즐겁다.학생들도 모두 즐거운 표정이었다.일행중 누군가 말했다.“이곳이 천년전 신라의 정신문화원이군!” 탑이 있을 곳에 꼭 그만한 탑을 세웠고 모퉁이를 돌았을 때 꼭 그럴만한 조각이 새겨져 있었다.그 옛날 번성했을 당시를 상상해보면 더욱 아름다운 것이었다.인도나 중국등 석굴에 대역사(大役事)는 많지만 이렇게 자연을 그대로 놓아두고 원래부터 그렇게 있었을 것처럼 자연스러운 경관을 창조한 문화는 내 아직 보지 못했다.그 중에서도 탑골 암벽에 새겨놓은,그 중에서도 남면 감실 속에 있는 릴리프는 그야말로 일품이라 할만하였다.모두가 만들다 만 것처럼,또 서툰 솜씨처럼 돼 있다.상당한 고수의 조각가가 높은 신심으로 깎아낸 것이라고 나는 생각했다.왜냐하면 그렇게 신선하고 때없는 운치와 사랑을 담을 수 있으려면 서툰 사람의 손으로는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뒷날 나는 여러 차례 경주에 찾아갔는데 새벽에는 석굴암을 경배하고 오후엔 남산 탑골을 잊지 않고 찾았다.

우리는 답사 당시 남산을 서에서 동으로 대횡단했는데 탑골을 맨 마지막 코스로 잡은 윤경렬 선생의 사려깊음과 사진작가 강운구 선생이 몇해에 걸쳐 남산을 찍고 책을 만들면서 탑골 꼭대기 남측 삼존불을 출발점으로 잡은 것은 생각할수록 기분좋은 일이었다.

최종태 교수<조각가.서울대>

<사진설명>

경주 남산 탑골의 부조 경주 남산 탑골 꼭대기에 만들다 만 것 같은 릴리프.서틀어 보이는 솜씨지만 운치와 사랑이 담긴데서 상당한 고수의 조각가가 남긴 작품임을 알 수 있다(사진은 사진작가 강운구씨의'경주 남산'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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