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국민가요’의 탄생 비화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1964년 미도파에서 발매한 <동백아가씨> 초반.

월간중앙 신인가수 이미자는 1964년 초까지 스카라극장 건너편 다방들을 드나들며 일거리를 찾았다. 이 와중에 우연히 일생일대의 기회가 찾아왔다. 국도극장에서 개봉한 당대 최고배우 신성일·엄앵란 주연, 김기 감독의 영화 <동백아가씨>의 주제가를 취입하는 행운이 온 것이다.

“원래는 남의 노래… 비싼 최숙자 대신 값싼 이미자 기용”

1960년대에 드라마나 영화 주제가 취입은 곧 인기가수로 나아가는 지름길이었다. 사실 <동백아가씨>는 이미자가 부를 노래가 아니었다. 처음 취입하기로 내정했던 가수는 당대 최고의 인기가수 최숙자였다.

하지만 미도파레코드에서 막 독립한 보따리장수 수준의 신생 레이블이었던 ‘지구’는 가수의 개런티가 부담스러웠다. 그래서 작곡가 백영호의 추천으로 이미자를 대타로 선택했다는 숨겨진 사연이 있다.

1964년 여름, 스카라극장 앞 목욕탕 건물 2층 녹음실. 만삭의 현미와 이미자가 찜통더위를 낡은 선풍기 한 대로 이겨내며 녹음작업을 끝냈다. 이때 현미는 <떠날 때는 말없이>를, 이미자는 한산도 작사, 백영호 작곡의 <동백아가씨>를 취입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두 사람 모두 그 노래가 자신의 대표곡이 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먼저 음반을 발표한 현미에 이어 이미자의 노래까지 동반 ‘대박’이 터졌다. 이에 가요계에는 “만삭에 녹음하면 대박난다”는 소문이 생겨 임신취입이 한동안 관행처럼 일반화하는 기현상까지 벌어졌다. <동백아가씨>는 취입 때부터 갖가지 사연이 만발했다.

‘지구’의 임정수 사장은 대중적 인지도가 없는 지구보다 한 지붕 회사였던 미도파 레이블로 슬쩍 음반을 발매했다. 처음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음반이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가자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미도파 측에서 회사 이름 도용을 문제 삼아 소송을 걸었던 것.

미도파와 지구, 두 회사의 <동백아가씨> 음반이 존재하는 것은 이런 복잡한 사연 때문이다. 미도파 레이블로 발매한 음반이 초반이고, 지구에서 발매한 음반은 재발매 음반임을 기억해 두자. 이미자의 <동백아가씨> 첫 녹음 버전은 굉장한 고역의 키였다고 전한다. 대중이 편안하게 들을 수 있도록 키를 조절하는 재녹음 끝에 그 해 7월 이 불후의 명반이 발매됐다.

그런데 음반의 타이틀곡은 영화 OST와 무관한 인기 배우 최무룡의 <단둘이 가봤으면>으로 정해졌고, <동백아가씨>는 뒷면에 수록되는 푸대접을 받았다. 다분히 음반 판매를 위한 상업적 결정이었다. 그러나 음반이 발매되자 상황이 급변했다. 이미자의 노래만 방송에서 흘러나왔던 것. 더구나 주제가의 인기가 영화를 능가하는 사태가 벌어지면서 음반을 사려는 사람과 전국의 음반업자들이 판을 구하지 못해 아우성쳤다.

연주비가 없어 작곡가 박시춘의 도움으로 어렵게 녹음을 했던 지구레코드사는 밤낮 없이 음반을 찍어내며 행복한 비명을 질렀다. 인기가수로 급상승한 이미자와 더불어 지구도 메이저급 회사로 동반 상승하기 시작했다. <동백아가씨>의 작곡가 백영호는 생전에 “그때는 술집에서 술값 대신 동백아가씨 음반을 한 장만 구해달라고 했을 정도였다”고 당시의 열풍을 회고했다.

이미자의 <동백아가씨> 열풍은 현해탄의 높은 파고마저 넘었다. 일본 빅터레코드사는 1966년 6월과 10월, 11월 세 장의 이미자 싱글 음반을 제작했다. 그 중 2장이 <동백아가씨> 음반이었다. 그런데 일본 정서에 맞게 제목을 <사랑의 붉은 등불>로 변경하고, 가사도 일부 수정하고, 이미자의 이름도 일본식 발음인 ‘리요시코’로 표기한 것이 문제가 됐다.

당시는 한·일 국교 수립 이후 반일감정이 극도로 악화했던 시절이었다. 이런 가운데 “이미자가 일본말로 노래를 취입했다”는 소문은 반일감정 확산에 기름을 부었다.“즉시 송환하라”는 비난과 노래에 대한 호기심이 뒤섞여 황당한 음반이 등장하기도 했다.

미모의 외국 여성 사진이 담기고 레이블도 없는 소위 ‘빽판’이었다. 재킷 뒷면에 <이미자 히바리고마도리 유행가집>이라고 쓴 조악한 등사지가 부착된 이 음반은 일본에서 밀수입해 음성적으로 배포된 <동백아가씨>의 해적판이었다.

매거진 기사 더 많이 보기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