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톡쏘기>1. 용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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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용궁엔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네? 별 볼일 없이 한번 구경이나 할까 해서 들렸다고요? 큰일 날 소리 하시는군요.여기가 어디라고 그런 말씀 함부로 하십니까.여기는 용궁입니다.용왕님이 사시는 용궁이 바로 여기라고요. 네? 제가 누구냐고요? 보시다시피 저는 용궁의 문지기인 거북이올시다.제가 바로 첫번째 문지기죠.용왕님을 볼 수 없냐고요? 그렇게 말하신 겁니까? 좀 크게 얘기를 해주세요.제가 나이를 오백살쯤 먹다보니 늙은 탓인지 가는 귀가 좀 먹었답니다.양해해 주세요. 그건 그렇고,용왕님 뵙기는 죄송하지만 어려울 것같습니다.아홉 개의 문을 지나야 용왕님을 만날 수 있는데 당신은 지금 첫번째의 문도 통과할 수 없는 것으로 판명이 났습니다.못들어갑니다.이건 제 판단이고 의무며 책임일 뿐만 아니라 권리이기도 합니다.죄송합니다만 돌아가 주세요.문지기로서 충고하건대 온 길로 곧장 돌아가시기 바랍니다.괜히 여기저기 기웃거리고 얼렁거리다가는 당신은 본의아니게 체포될 수도 있으니까요. 무슨 말인지 아시겠습니까? 이곳은 무시무시한 곳이란 말입니다.죽음의 냄새와 살기를 못 느끼셨습니까? 하하! 당신은 꽤나 둔한 양반이시군요.그렇다면 내가 노파심으로 용궁이 어떤 곳인지 조금만 이야기해 드리리다.흠흠,늙으면 가래가 끓나봐요.기억력도 둔해지고 잔소리가 많아지죠. 자,잘 들으세요.용궁이란 어떤 곳이냐 하면 물고기의 왕이 사는 궁이랍니다.용왕님이 물고기의 왕이냐고요? 그렇게 물으셨습니까? 맞습니다.하지만 알아두세요.이름이 용왕이지 용이 아닙니다.물론 용의 뿔과 용의 비늘과 용의 발톱을 가졌지요.겉보기엔 용과 비슷할걸요.그러나 용이 결코 아니에요.모습도 용같고 이름도 용왕이지만 용은 아니란 말입니다.

놀라셨습니까? 눈이 뚱그레진걸 보니 조금 놀라신 모양이군요.그럼 용은 어디 있냐고요? 없어요.내가 오백년 세월동안 문지기를 했는데 이 용궁으로 진짜 용이 들어오는걸 보지 못했습니다.그럼 누가 들어왔냐? 고래도 들어오고 상어도 들어오고 문어도 들어왔답니다.물고기들이 물고기의 왕을 뽑으니까 멸치가 들어와 용왕 노릇을 해도 나로선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가령 물고기들이 상어를 용왕으로 뽑았는데 그 용왕이

물고기를 잔인무도하게 잡아먹어 바다가 피바다가 되고 피노을이 몇년간

바다에 번졌다고 합시다.그게 누구 책임이겠습니까.그리고 또 가령

물고기들이 포악한 용왕에게 겁을 먹고 멍청해 보이는 멍게를 용왕으로

뽑았더니 바다 전체에 멍청한 기운이 뻗쳐 도처에서 썩은 고기들이 멍한 눈을

굴리며 흐느적 흐느적거리는 사태가 일어났다고 합시다.그게 누구

책임이겠습니까? 대답을 안하시는군요.좋습니다.아무튼 물고기들이 어안이

벙벙해 그랬는지 물고기의 왕으로 뽑은 용왕들이 다 신통치 못했던게

사실입니다.진짜 용왕님은 어디 숨어 계시는 건지,그게 궁금합니다.용궁의

문지기로 헛되이 늙다 죽기 전에 참다운 용왕님의 용안(龍顔)을 뵈어야

하찮은 문지기에도 보람이 있고 삶의 의미가 있고 후세의 문지기들에게

떳떳하게 할 말이 있을텐데,나는 이 생을 용궁 문옆에 우두커니 서 있는

비석처럼 보내는 느낌이 듭니다.종종 그런 느낌이 들어요.정말입니다.

특히 용궁에서 무슨 끔찍한 일이 있었는지 용왕들이 독살을 맞아 죽은

몸으로 용궁의 문을 빠져나가거나 무슨 음모인지 사필귀정의 업보인지

그물을 쓴 죄수의 몸으로 끌려나가는걸 볼 때마다 이 용궁은 너무 불길하고

무시무시한 곳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아시겠습니까? 용궁이 왜 무서운 곳인지.그런데도 용궁에 들어가

보시겠습니까?하긴 요즘엔 용궁 밖에서도'난 용이 되고 싶소'라고 서슴없이

나서서 말하는 양반들이 꽤 많다고 하더군요.당신은 그들을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어허! 이 양반,내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도망가버렸네.

<사진설명>

최승호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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