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산 재개발 참사] 쟁점3. 조기 투입 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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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경찰은 철거민 농성이 발생하면 충분한 대화와 설득으로 해산을 유도했다. 극한 상황에 몰린 철거민들의 특성상 무리하게 진압하면 대형 사고로 이어질 수 있다는 판단에서다. 이 때문에 철거민 농성은 장기화될 때가 많았다. 2005년 경기도 오산 세교택지개발지구 농성이 대표적이다. 철거민들은 당시에도 빌라에 망루를 설치하며 시위를 벌였고 해산까지 59일이 걸렸다. 당시 경찰은 컨테이너박스를 이용해 진압했지만 이번처럼 강경한 대응은 아니었다.

경찰은 ‘서울에서 26개월 만에 재등장한 화염병’에 주목했다. 시위대는 19일 건물을 점거하자마자 화염병을 던졌다. 서울에서 화염병이 등장한 것은 2006년 11월 5·18 희생자 단체 관계자들이 국가보훈처 앞에서 경찰을 향해 화염병을 던진 이후 2년2개월 만에 처음이다. 서울경찰청 김수정 차장은 20일 브리핑에서 “도심지였고 하루 종일 화염병을 투척하고 있어 일반 시민에게 심각한 피해를 줄 수 있었다. 하루 종일 화염병과 쇠구슬·돌 따위가 날아 다녀 승용차가 부서졌다. 시민이 다칠 수 있는 상황에서 더 이상 시간을 끌 수 없다고 판단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경찰이 위험 요소가 많은 데도 성급하게 진압한 것 아니냐”는 취재진의 질문에 대해서는 명확한 대답을 내놓지 못했다. 김 차장은 “시너를 자기들한테 뿌린다는 건 자살 행위니까….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며 “소방방재 쪽과 충분히 대책을 강구했다”고 말했다. 큰 폭발력을 가지고 있는 인화물질이 가득 들어 있는 망루에 시위대가 몰려 있었고, 그들은 화염병을 던지고 있었다. “위험 상황을 판단해 유연하게 대처했어야 했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경찰이 진압을 서두른 또 다른 이유는 ‘주동자들이 외부의 시위 전문가’라는 판단 때문이었다. 사망 사건 현장에서 경찰은 28명을 검거했다. 이 중 용산 4구역 세입자는 7명뿐이다. 나머지는 모두 외지인이었다. 병원으로 이송된 부상자도 대부분 전철연 소속이었다. 단시간에 망루를 설치하며 방어 태세를 만든 것, 화염병을 제조해 무차별적으로 던진 것 모두 ‘프로’가 아니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게다가 한강로변은 한강대교와 연결돼 있어 교통량이 많다. 특히 한강대교에서 용산 방향 도로는 평소에도 극심한 출근 정체 현상을 보이는 곳이다. 남일당빌딩은 대로변에 있었다. 시위대는 장기전을 노렸을지 모르지만 경찰은 인내하기 힘든 상황이었다. 진압에 전격적으로 경찰특공대가 동원된 것에 대해 서울청은 “고공작전을 펴야 했고, 화염병 등 위험 요소가 많아 고도로 훈련된 특공대가 적합했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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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인식·이진주·이정봉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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