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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권 2년차 투서·루머 전쟁 … “조선시대 궁중 암투 실감케 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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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이명박 대통령이 집권 2년차 새 진용 짜기에 고심하는 사이 정·관계가 예상치 못한 부작용에 시달리고 있다.

경쟁자의 약점을 찌르는 투서가 쏟아지고, 루머가 꼬리를 잇는 파워게임 양상이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다. ‘만인(萬人)대 만인(萬人)의 투쟁’ 형국이다. 권력 핵심부인 청와대도 예외가 아니다. “조선시대 궁중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경험해 보지 않아도 실감이 간다”는 이야기가 청와대 고위직들 사이에서 나올 정도다.

최근 박병원 경제수석 관련 의혹이 흘러나온 배경을 놓고도 ‘석연치 않다’는 반응이 나온다. 의혹이 확대·포장된 흔적이 있다는 얘기가 나온다. 이번 일을 스크린해온 관계자들의 말을 종합하면, 감사원이 공적자금이 투입된 은행들에 대한 감사를 벌이는 과정에서 우리금융지주 회장을 지낸 박 수석을 조사할 필요성이 생긴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박 수석과 전혀 무관한 부분들까지 박 수석 책임인 양 포장돼 흘러나오고 있다. 사정당국의 한 관계자는 “박 수석 재임 시절 벌어진 일이 아닌 일들까지 의혹의 대상으로 보도되자 감사원 관계자들이 깜짝 놀란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의혹이 터진 시점을 두고도 말들이 많다. 수석과 비서관 교체를 최소화하는 방향으로 개편의 가닥이 잡힌 상태에서 박 수석 관련 의혹이 불거진 때문이다. 그래서 청와대 내부의 누군가가 조직 개편과 인사 교체의 폭을 크게 하기 위해 박 수석 관련 의혹을 부풀린 것 아니냐는 이야기까지 돌고 있다.

인사를 앞두고 투서가 쏟아지는 게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다. 특히 권력 교체기에 투서가 난무한다. 하지만 새 정부 2년차를 맞은 올해 유독 투서와 루머가 쏟아지고 있다는 게 인사·사정 업무를 맡고 있는 정부 관계자들의 얘기다.

이런 일도 있다. 유임이 유력시되는 모 장관과 관련, 최근 “이 대통령의 친척인 모 인사와 가장 가까운 친구여서 장관직에 올랐으며, 무슨 잘못을 하더라도 계속 유임시킬 수밖에 없다”는 내용의 투서가 관계기관에 접수됐다. 정부의 한 고위 관계자는 “소문을 확인해 보니 두 사람 사이에 나이 차이도 많고, 이 대통령의 친척이라는 모 인사의 경우 인사청탁을 할 인물이 아니어서 허위 루머로 결론이 났다”고 말했다.

또 모 기관장과 관련해선 “업무와 관련해 업체로부터 미화로 돈을 받았다”는 제보가 접수돼 사정당국이 확인에 나선 일도 있다. 또 권력기관장들 중 누가 경질되느냐가 초미의 관심이 되자 “(경쟁 관계에 있는) 특정 기관에서 경쟁적으로 다른 기관장에 대한 나쁜 소문을 청와대에 보고하고 있다”는 설도 파다하다.

“투서들 중 99%는 신빙성이 별로 없다”는 게 투서를 오래 다뤄온 감사원 관계자의 설명이다. 하지만 개중엔 제보가 사실로 드러난 경우도 있다.

한상률 국세청장이 지난 연말 경북 포항지역 기업인들과 골프·식사를 함께한 일을 청와대가 처음 파악한 것은 제보성 투서 덕택이었다. 이후 민정수석실이 나서 사실 관계를 추적했고, 제보의 상당 부분이 사실로 밝혀졌다.

한 청장의 경우 그림 로비 의혹 외에도 확인이 불가능한 숱한 투서와 제보가 청와대에 쏟아지고 있다고 정부 관계자가 전했다.

여의도 국회 주변에서도 ‘믿거나 말거나’식 소문들이 끊이지 않는다. 1기 청와대에서 고위직을 지낸 인물이 개각과 인사작업을 진두지휘하고 있으며, 지난 연말 청와대에서 이 대통령을 독대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하지만 당사자와 이 대통령을 지근거리에서 보좌하는 비서실에선 펄쩍 뛰며 부인했다. 친박근혜계 의원들의 대통령 독대설도 끊이지 않는다. PK(부산·경남) 출신 모 인사의 경우 사회분야 장관직을 제안받았다는 이야기가 돌았다. 또 장관 물망에 오른 친박 진영의 한 의원에 대해 이 대통령이 “장관이 되기엔 역량과 경륜이 너무 모자란다”고 일축했다는 네거티브성 루머도 퍼지고 있다.

왜 이런 현상이 빚어질까. 우선 사분오열돼 있는 여권 내 권력구조가 문제로 꼽힌다. 권력 내 핵심 그룹이 단단하지 않고 분열돼 있어 각 세력 간 과열 경쟁이 투서와 루머를 양산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과거 상도동계나 동교동계와 달리 현재 권력의 핵심부는 이상득 의원계와 이재오 전 의원계, 정두언 의원 등 소장파 그룹으로 뿔뿔이 나뉘어 있다. 최근의 인사작업은 이 대통령이 극히 제한된 청와대 실무진과 함께 비밀리에 진행하고 있다는 게 정설이다. 이 때문에 각 세력이 끼어들 여지가 크지 않다. 이 때문에 각 계파는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채널과 수단을 가동해 외부 선전전을 가동하고 있고, 이 과정에서 투서와 루머가 쏟아지고 있다는 설명이다.

연말 개각설이 돌던 지난해 12월에는 이 대통령의 전·현직 핵심 참모급 다섯 명이 부부 동반으로 1박2일 주말 골프 여행을 했다는 이야기가 돌았다. 한쪽에선 “몸가짐을 조심해야 하는 사람들이 자숙하지 않고 있다”고 헐뜯고, 루머의 당사자들은 “헐뜯기 위해 루머를 과대 포장했다”고 받아치는 힘겨루기가 수면 밑에서 한동안 이어졌다.

서승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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