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최우석 칼럼

삼고초려와 총리 영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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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삼국지에서 삼고초려(三顧草廬)편이 인구에 회자되고 인기를 끄는 이유는 무엇일까. 유비(劉備)가 제갈공명을 세 번이나 찾아가 군사(軍師)로 모셔오는 장면인데 매우 인상깊고 감동적이다. 윗사람은 아랫사람을 어떻게 맞아들이며 아랫사람은 윗분을 어떻게 정하는지를 이상적으로 그리고 있다. 유비가 공명을 맞은 것은 역사상 가장 성공한 스카우트 중의 하나로 꼽히고 있다. 우연히 그렇게 된 것이 아니다. 대의명분과 효과성, 또 영접 절차가 모두 맞아떨어졌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게끔 삼국지에선 그리고 있다. 두 사람은 서로 어떤 사람인지를 알고 있었다. 당시 유비는 근거지도 없는 어려운 처지였지만 덕이 있고 큰 뜻이 있다는 평판이 있었다. 공명은 널리 소문난 인재였다.

*** 理想 맞춰보고 전략도 합의

두 사람은 만나 서로의 뜻을 확인한다. 난세에서 백성을 구하고 한실 부흥을 목표로 삼자는 대의명분에 공감한다. 코드가 아니라 지향하는 이상을 서로 맞추어 보고 안심하는 것이다. 구체적인 전략에서도 대체적인 합의를 본다. 이때 공명이 제시한 것이 천하삼분지계(天下三分之計)다. 그냥 의욕만 갖고 뛰어드는 것이 아니라 먼저 형주(荊州)를 얻어 기반을 닦은 다음 익주(益州)를 합치고 힘을 길러 장차 중원으로 나가 천하를 차지한다는 구체적인 청사진이다. 사실 이 구상대로 국책이 추진되고 천하 형세도 비슷하게 전개되었다. 요즘 이상이나 전략에 대해 합의함없이 덜컥 자리를 주고받았다가 중도에서 낭패를 당하는 경우를 많이 본다. 어떤 자리에 가장 필요한 사람을 모셔오는 것이 아니라 그냥 한자리 준다는 인식이 강하기 때문이다.

그 다음 효과성인데 두 사람은 서로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효과 극대화를 위해 최선의 노력을 한다. 당시 유비는 넓은 전략적 안목과 고도의 전문적 지식을 갖춘 큰 인재를 절실히 필요로 했다. 의리로 뭉친 임협(任俠)의 무리에서 벗어나 천하를 경영하려면 대담한 인재수혈이 긴요했던 것이다. 공명도 평소 닦은 재주를 한번 펴보려면 주인을 잘 만나야 했다. 조조(曹操) 쪽은 이미 체제가 정비되어 있어 새로 들어갈 틈이 적었다. 손권(孫權) 쪽도 공명을 인정은 해도 마음껏 재주를 펴보게 재량권은 안 줄 것이라고 판단했다. 그래서 공명은 당시로선 가장 허약하지만 장래성 있는 유비를 선택한 것이다. 그 판단이 정확했다.

공명이 유비 진영에 가담했을 때 견제가 많았다. 20여년을 유비를 따라다닌 의형제와 가신들이 갑자기 높게 뛰어드는 신참자를 좋아하지 않을 것은 뻔한 일이다. 유비는 조직의 인화도 깨지 않으면서 공명이 일을 마음껏 하게 하는 기막힌 리더십을 발휘한다. 여기에 바로 유비의 위대함이 있는 것이다. 아무리 좋은 사람을 모셔와도 기존 조직의 텃세 때문에 실패하는 경우가 많다. 삼고초려는 그 후의 대목이 더 빛난다. 공명은 유비 진영에 참여하여 끝까지 승상 노릇을 할 뿐 아니라 2세대까지 활약한다. 2대에 걸쳐 최고위직에 있을 수 있었다는 것은 공명의 뛰어난 재주와 충성심뿐만 아니라 유비라는 큰그릇이 뒷받침했기에 가능한 일이다.

*** 신하 된 뒤엔 눈물겨운 충성

마지막으로 영입절차도 매우 중요하다. 유비는 공명을 맞기 위해 세 번이나 찾아간다. 그것도 겨울 눈보라가 휘날릴 때 20리길을 고생하며 찾아갔다가 못 만나고 돌아온다. 당시 유비의 나이는 47세. 20세나 연하인 백면서생 공명을 만나기 위해 유비는 다음해 봄 또 한번 찾아간다. 그래서 겨우 만나 간신히 모시고 오는데 좋은 사람을 모시려면 이 정도의 정성은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또 마음껏 재주를 펴려면 이 정도의 대접은 받고 가라는 뜻도 된다. 공명은 유비의 수하에 들어가기 전엔 이렇게 도도하게 굴지만 신하가 되고 나선 그야말로 눈물겨운 충성을 바친다. 유비는 공명이 도저히 거절을 못하게, 또 최선을 다하게 지극정성을 다했던 것이다. 그 과실은 유비에게, 또 궁극적으로는 백성들에게 돌아갔다. 요즘 우리도 국무총리감을 구한다는 소리를 들으니 옛 이야기가 새삼 생각난다.

최우석 삼성경제연구소 부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