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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티 페르소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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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페르소나(persona)’는 대개 특정 감독의 영화에 여러 편 출연하며 감독의 의중을 잘 표현하는 배우를 가리킨다. 팀 버튼(감독)-조니 뎁(배우), 마틴 스코세이지-로버트 드니로, 왕자웨이(王家衛)-량차오웨이(梁朝偉), 장진-정재영, 이준익-정진영 등의 조합을 떠올릴 수 있겠다.

페르소나는 원래 라틴어로 연극 배우가 쓰는 큰 가면을 뜻했는데, 세월이 흐르면서 ‘인격’이란 의미로 확대됐다. 정신분석학자 카를 구스타프 융은 이 페르소나의 개념을 자신의 이론을 펴는 데 활용했다. 인간의 의식 영역이 ‘진짜 나’인 자아(ego)와 세상을 향한 가면인 페르소나로 이뤄져 있다는 것이다. 영화 ‘강철중:공공의 적 1-1’을 예로 들면 흉포한 범죄조직 두목(정재영)도 가정에선 자상한 아버지일 뿐이다.

문학에서도 페르소나는 다양하게 변주돼 왔다. 작가 이청준의 소설 ‘가면의 꿈’(1975년)에는 일류 대학을 거쳐 사법시험에 합격한 젊은 판사가 등장한다. 그는 가발을 쓰고 콧수염을 붙인 채 밤거리로 외출하는 습관이 있다. 가면 놀이를 통해 사회 생활의 가식에서 쌓인 피곤과 긴장을 푸는 것이다. 그는 “사람들은 제각기 자신의 가면을 튼튼하게 단련시켜 가고 있거든…”이라고 중얼거린다.

최근 들어서는 페르소나를 넘어 멀티 페르소나(multi-persona)가 각광받기 시작했다. 현대경제연구원은 2009년의 트렌드로 ‘멀티 페르소나 소비’를 꼽았다. 소비자들이 경기침체 속에 값싼 제품을 선호하면서도 그 보상 심리로 과감하게 명품을 구입하는 다중적 행태를 보일 것이란 예상이다.

지난해 7월 미국 워싱턴DC에서 열린 세계미래회의도 멀티 페르소나를 주요 의제로 다뤘다. 첨단기술의 발달로 가상공간에서 대리 만족을 추구하는 디지털 정체성이 확대된다는 얘기다. 특히 이런 현상이 정치·경제·사회·문화 전 부문으로 파급되면서 다양한 법적 문제가 생길 것으로 보았다. 미국이 2006년 연방 민사소송 절차법 개정을 통해 e-메일 등 전자 정보에 대해 증거 능력을 인정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국내에서도 변호사가 법률 검토 의견서를 담은 e-메일을 고객에게 보냈다가 압수수색을 당해 물밑 갈등이 벌어지곤 한다. 변호사들은 “고객과의 내밀한 대화가 오히려 증거나 수사 단서로 쓰이는 일은 없도록 해야 할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검찰은 “예외를 인정하기 힘들다”는 입장이다.

이제 멀티 페르소나 현상은 피할 수 없는 현실로 다가오고 있다. 순기능과 역기능을 가려내는 혜안이 필요한 때다.

권석천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