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은의 세상월령가 6월] 이 강산 낙화유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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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종구 작 ‘강산’, 50x65cm, 캔버스에 아크릴릭, 2004.

달포 전 금산에 잠깐 다녀온 적이 있다. 바야흐로 그곳은 금수강산이었다. 초록 산빛 속의 산벚꽃, 조팝꽃 덤불이 사태져 있었다. 내 눈에 복(福)을 가득 채운 그 꽃 잔치는 오래 전 잃은 순정과 신기(神氣)까지 불러내는 듯했다.

늦은 진달래와 이른 철쭉 또한 이 골짝 저 골짝에서 나 좀 보고 가라고 우르르 소리 지르고 있었다.

본디 전북 금산. 5.16 이후 최고회의 간부인 길재호가 그곳 길씨 마을을 근거로 국회의원 후보가 되는 과정에서 충남 금산으로 바뀐 것이다. 해방정국의 우익 임영신, 유진산과 좌익 이현상이 그 고을에서 태를 묻었다. 지금은 시인 안용산이 좌도문학동인을 꾸려가고 있다.

금산은 산고을이다. 3000여 봉우리의 크고 작은 산이 있다. 지형은 큰 분지에 새끼분지 700여개가 들어찬 형세다. 그런 산비탈 도처에 조상의 넋이 깃든 자연부락 480개가 삶의 터전이 되어준다.

여기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산간지대 전체를 하나의 공원으로 만들어가는 환경미학이 실천되고 있는 것이다. 금산군 자연공원운동이 그렇다.

먼저 산의 잡목이나 거친 푸나무 서리를 제거하고 나무와 나무 사이도 숨통을 터주는 노역이 7년째 멈추지 않고 있다. 특히 5년 전부터 10개년 계획으로 1000개의 자연공원을 만들고 있다 한다.

자연공원이란 자연에 최소한의 인간 개입을 통해 자연의 품위를 높이는 것이다. 진작 독일의 산림지대도 이런 자연공원의 한 사례가 되겠다.

마치 민주화과정의 최우선 해법이 되는 것처럼 지방자치제가 실시되었다. 그런데 각 지자체들이 너나없이 당장의 개발논리에 눈멀어 국토 내지 향토의 자연환경을 황폐시키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전의 중앙정부의 개발독재보다 더하면 더했지 그보다 덜한 것이 아니다.

이런 저질의 개발들이 국토의 존엄성을 회복불능 상태로 만들어가고 있는 것과 달리 금산의 1000개 자연공원운동은 다른 고을들이 두루 본받아 마땅한 시범이다. 공공근로사업비 배정액을 고스란히 이 사업에만 쓴 결과 신안리 산벚꽃동산, 화원골 조팝공원, 칠백의총 진달래공원들이 만들어졌고 심지어 예비군 훈련장까지 야생화공원이 된 것이다. 금산군수는 이 자연공원 운동을 비보적(裨補的) 자연관의 실천이라 한다.

국토는 국토 이상이다. 나라는 망해도 국토가 있으면 언젠가 망한 나라를 다시 세울 수 있다. 두보(杜甫)는 나라는 망해도 산하는 남아있다고 노래한 바 있다. 그 산하에 봄이 오면 꽃이 핀다. 세상의 흥망성쇠가 오로지 산하 안에서 명멸하는 것이 유구한 역사 아닌가.

한국 근대화의 저돌적인 개발과 성장이 몰고 온 심성 파괴와 함께 지자체시대의 막 개발이 보여주는 산하에 대한 모독은 이제 참을 수 없는 데까지 왔다.

지금 국토는 하루하루 망해간다. 다시 두보가 살아난다면 이런 한국과 이런 중국을 보고 나라는 일어났으나 산하는 망했도다라고 노래할 것이다.

다른 나라를 돌아다닐 때마다 내가 태어나고 내가 살아가는 국토의 한 귀퉁이가 얼마나 신성한 곳인가, 얼마나 소중한 곳인가를 새삼 깨닫게 될 때가 한 두 번이 아니다.

지구본을 돌려본다. 지구본의 한 군데에 한반도가 있다. 비록 분단시대의 조국이긴 하지만 장차 하나의 조국이 되면 얼마나 더 자랑스럽겠는가.

중동 쪽으로 눈이 간다. 그곳은 아랍인과 유대인이 사활을 걸고 싸우고 있다. 팔레스타인 시인 다르위시는 '나라 잃은 자는 온 천하에 제 무덤도 못가진다'라고 부르짖었다. 마음 아프지 않을 수 없다.

어린 아이 코흘리개가 이스라엘 탱크 앞으로 내달려가 자폭하는 광경이 오늘의 팔레스타인 문제를 표상한다.

4000년 전에 정착한 야곱의 자손 셈족은 그 뒤 이산, 귀환, 번영, 분열, 망국, 해방과 길고 긴 속방(屬邦)에 이르러 다시 국외로 쫓겨났다. 이 디아스포라로 천몇백년 동안 떠돌다가 고토로 돌아온 것이 시온주의다. 하지만 그들의 까마득한 고토란 텅 비워 둔 곳이 아니라 엄연히 아랍인의 오랜 삶의 현실이었다. 20세기 초 이래 두 민족은 지칠 줄 모르는 전쟁을 이어오고 있다. 이 과정에서 이스라엘은 미국의 지원으로 팔레스타인의 땅을 삼켜온 것이다.

이런 영토전쟁은 새삼스레 내 나라 내 겨레라는 역사공동체의 공간에 대한 절실성을 떠올려준다.

어디 거기뿐인가. 유고연방이 해체되자마자 그곳은 4분5열의 종족, 종교, 영토의 문제로 끔찍한 지옥이 되어버렸다.

지금 중국은 5000년사 최대의 영토를 가진 나라다. 미국의 세계전략 가상적(假想敵)이 중국이라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이런 중국이 동북공정(東北工程)이라는 국책사업을 강행하고 있다.

상고시대 부여와 고구려사를 한국사의 범주로 삼는 것을 앞으로 묵인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광개토대왕비와 그 밖의 유적지를 봉쇄하고 김일성.저우언라이가 합의한 발해유적 공동발굴사업도 멈춰버렸다.

그런가 하면 난사군도는 중국과 베트남 필리핀이 삼각관계의 불화를 자주 드러내고 있다.

일본은 어떤가. 중국 연안의 섬 하나가 자기네 것이라 해서 중국과의 긴장을 마다하지 않는다. 일본은 또한 동해상의 한국 영토인 독도를 자기네 섬이라고 우겨대고 있다. 게다가 동해를 일본해로 표기하는 일을 세계 각국의 지도 제작에 집요하게 반영시키고 있다.

영국은 머나먼 아르헨티나 연안의 섬 하나를 자기네 것이라고 해서 왕세자까지 참전시켜 선제공격을 하지 않았던가. 세계화 이후 오히려 이 같은 민족 문제, 영토 문제가 더욱 심각해지고 있는 것이다.

나는 내가 살고 있는 국토가 빼앗긴 땅이라는 기억을 가지고 있다. 나라 없는 민족이 얼마나 많은 피눈물을 흘려야 하는가를 너무 일찍 알았다. 그것으로도 모자라 나라가 둘로 갈라선 민족이 얼마나 수치스러운 것인가를 모를 리 없는 시대를 살고 있다.

이런 시대임에도 이른바 근대국민국가의 종말이나 국가해체론의 섣부른 논리들을 들여다가 하나의 패러다임으로 꾸미는 경우가 종종 있다. 따라서 민족주의 국가관은 낡은 것이고 하루 속히 무효화해야 한다는 담론들은 하나는 철부지이고 하나는 철 이른 수작인지 모른다.

민족을 영구불변의 진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역사 속의 정체성 역시 필요한 만큼 만들어지는 관념일 경우도 없지 않다. 이는 19세기 말 르낭이 벌써 유럽연합을 예언한 것처럼 탈민족론도 다가오는 미래의 어디쯤에서는 제 때를 맞을지 모른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한 번 더 국민국가 안에서의 시민적 각성을 지향해야 한다. 그러자면 그런 문화를 담을 국토에 대한 커다란 사랑을 전제해야 한다. 우리가 꿈꾸는 인간정신의 승화도 국토와 자연의 정화로만 가능한 것이다.

마침 시대는 새로운 출발점에 서 있다. 정치도 경제도 질적 전환 없이는 안 된다. 지금 한국인은 산 하나 그대로 두지 못하고 제 집을 나가면 쓰레기 하나 치울 줄 모르고 간판 하나 멋지게 달 줄 모른다. 국토에 대한 공공의식의 중요성에서도 너무 멀리 떨어져 있다.

조국은 섬기는 일과 가꾸는 일 없이는 새로 태어나지 못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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