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세기를찾아서>15. 히말라야 산기슭에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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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오늘은 히말라야의 산기슭에서 엽서를 띄웁니다.지금은 깜깜한 밤입니다.이 곳의 밤은 서울의 밤이 감히 만들어내지 못하는 칠흑같은 어둠입니다.나는 이 어둠의 거대함에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우주가 한 개의 덩어리가 돼 나타나는 그 엄청난 크기에서 나는 참으로 소름끼치는 두려움을 금할 수 없습니다.그것은 공간과 시간을 넘어선 어떤 운명으로 엄습해 옵니다.내일 아침에 해가 뜨면 어둠 속에서 그 모습을 드러낼 안나푸르나의 연봉과 마차푸차레의 설산이 차라리 구원처럼 기다려집니다. 그러나 그 산이 아무리 우람한 것이라 하더라도 그것은 이 거대한 우주의 심부름꾼에 지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히말라야를 어둠 속에 묻어둔 하늘에는 설봉(雪峰)대신 지금은 별이 있습니다.우리가 희망을 잃지 않는 것은 ‘어둠이 깊으면 별이 더욱 빛난다(夜深星逾輝)’는 사실이라고 했습니다.세상이 힘들고 무서운 사람들이 밤하늘의 별들을 바라보는 까닭을 알 것 같습니다.

나는 오늘 저녁 이 곳에서 낮에는 설산을 지척에 두고 밤에는 찬란한 별들을 우러러보며 척박한 다락논을 일구며 살아가는 사람들을 만나고 있습니다.이 거대한 어둠과 별들, 그리고 신비로운 설산이 사람들의 삶과 마음에 과연 무엇이 돼 들어와 있는가 하는 물음을 갖게 됩니다.

생각하면 우리의 삶은 이 거대한 우주 속에서 한 개의 작은 점으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아득히 잊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이 우주와 자연의 거대함에 대한 망각이 인간의 오만이 될까 두렵습니다.

히말라야가 네팔에서 차지하는 무게는 가위 절대적입니다. 그것은 네팔의 문화이며 네팔 사람들의 심장입니다.히말라야를 보지 않고 네팔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삼국지를 읽지 않고 영웅호걸을 논하는 격이라며 내게 권한 것이 비행기로 히말라야 산군(山群)을 가까이서 보는 소위 플라잉 사이트(Flying Sight)였습니다.히말라야의 연봉을 거쳐 최고봉인 에베레스트를 비행기로 다가간다는 것은 아무래도 외람되다는 생각이 앞섰습니다.기껏 한 마리 모기가 돼 거봉의 귓전을 스치는 행위는 내게도 별로 달가운 일이 못된다 싶었습니다.

나는 히말라야의 일출을 볼 수 있다는 나갈코트로 갔습니다.멀리 히말라야의 능선 위로 뜨는 해를 바라보는 정도가 나그네의 분수에 맞는 일입니다.그래서 밤길을 달려 나갈코트에서 하룻밤을 묵으며 히말라야의 일출을 기다렸습니다.그러나 밤부터 시작된 가랑비가 끝내 보여주지 않았습니다.그래서 오늘은 포카라에서 출발해 이곳 담푸스의 작은 마을에 도착해 당신에게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포카라는 히말라야를 바라보며 산길을 걷는 트레킹의 출발지입니다.우리는 돌계단이 많은 코스를 버리고 인적이 드문 산길로 접어들었기 때문에 아직은 히말라야를 보지 못했습니다.

일 새벽이면 저 칠흑같은 어둠을 헤치고 히말라야가 하늘에 나타날 것입니다.우리는 모닥불에 둘러앉아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이 산 속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대체로 티베트계이거나 셰르파족으로 우리와 같은 몽고족입니다.얼굴이나 말의 억양이 우리와 너무나 닮았습니다.잊고 살아오던 자연 속에서 오랜 세월 헤어졌던 혈육을 상봉하는 듯한 반가움을 느끼게 됩니다.

그동안 고생많았지요,어떻게 살아왔어요?라고 첫인사를 하고 싶었습니다. 그 멀고 먼 세월을 흘러 여기 이 비탈진 기슭에 용케도 정처를 얻었구나.그래서 그 많은 신들을 모셨구나.그래도 마음 저버리지 않고 히말라야의 차가운 물에 정갈히 씻어 곱게도 간수했구나.

그들도 우리에게 묻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그리고 이야기했습니다.당신들은 많은 것을 만들고 소유하고 있는 나라에서 살고 있지요.이 곳을 지나 히말라야의 정상으로 가는 사람들도 많이 있지요.그러나 산은 정복할 수 없는 것입니다.그것은 신입니다.우리는 산이 허락하는 만큼의 땅만을 일구어 살아가고 있습니다.한 사람이 먹고 살 수 있을 만큼만 일구지요.농토의 넓이도 한 사람, 두 사람으로 세기도 해요.그들의 이야기는 마치 히말라야가 우리에게 들려주는 말 같았습니다.

히말라야의 최고봉은 영국 측량기사의 이름을 따 에베레스트라고 하지만 이 곳 네팔이나 티베트에서는 예부터 ‘큰 바다의 이마’(사갈고트) 또는 ‘세계의 여신’(초모랑마)이라 불러 왔습니다.높고 성스러운 뜻을 담고 있습니다.이 곳 사람들은 정상에 오르는 일이 없습니다. 그 곳은 정복의 대상이 아니라 경외의 대상입니다. 두려움을 남겨두어야 사람이 된다는 옛말이 있습니다. 더구나 그 곳은 사람이 살 곳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 곳을 오르는 것은 없어도 되는 물건을 만들거나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농락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산의 높이를 숫자로 계산하는 일도 없습니다.하물며 정상을 그 산맥과 따로 떼어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산맥이 없이 정상이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1953년 영국의 에드먼드 힐러리가 에베레스트를 정복했다고 했지만 셰르파와 안내인 8천여명의 도움으로 올랐다고 했습니다.지금 저만치 어둠 속에 있는 마차푸차레는 네팔의 성산(聖山)으로 등산이 금지된 산이지만 발표만 못할 뿐 누군가가 이미 그 정상을 정복(?)했다고 합니다.

어둠 속에서 듣는 이 곳 사람들의 이야기가 모닥불처럼 가슴을 파고 듭니다.그것은 인간이 인간에게 인간적이어야 하며,인간이 자연에 자연적이어야 한다는 준엄한 교훈이었습니다.

당신이 네팔에 오면 먼저 히말라야의 이야기를 들어야 합니다.등산장비를 지고 히말라야의 어느 정상을 오르거나 래프팅을 즐기기 위해 계곡의 급류를 찾아가기 전에 히말라야가 우리에게 들려주는 이야기에 겸손히 귀기울여야 합니다.모험과 도전이라는 ‘서부행(西部行)’에 나서기 전에 먼저 어둠과 별들의 이야기를 들어야 합니다.그리고 생각해야 합니다.

자연이 우리에게 허락하는 문명의 크기를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당신의 말처럼 문화와 문명의 기본은 ‘자연’입니다.그리고 ‘자연의 문화(Culture of Nature)’가 문화의 속성이기 때문입니다.

<신영복 성공회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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