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환영 기자의 팩션 인터뷰] 양심·도덕 제기능해야 자본주의가 균형 찾을 것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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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6호 14면

애덤 스미스는 2007년 3월 영국중앙은행이 발행하는 20파운드 지폐에 등장했다.

“애덤 스미스는 죽었다. 마르크스를 다시 살필 때가 왔다.” 2008년 5월 터키의 대기업가인 이샤크 알라톤이 한 말이다. 1790년 사망한 스미스를 두고 ‘죽었다’고 말한 건 역설적으로 그가 아직 ‘살아 있다’는 방증이다.

『도덕감정론』 출간 250주년 맞은 애덤 스미스를 만나다

현대 자본주의에서 신자유주의가 득세한 지난 30년은 스미스의 전성시대였다. 그가 쓴 『국부론』(1776)은 자본주의의 성서로 떠받들어졌다.

2009년은 스미스가 다른 각도에서 부활하는 해다. 도덕철학자이기도 한 그가 『도덕감정론』을 출간한 지 250년 되는 해이기 때문이다. 그의 출세작인 『도덕감정론』은 스스로『국부론』보다 훌륭하다고 평가한 책으로 사망 직전까지 수정을 거듭해 6차 개정판까지 나왔다. 자본주의 체제를 자율적으로 작동케 한다는 그 유명한 보이지 않는 손’이 이 책에서 처음 등장했다.

지난해 8월 영국 에든버러에서 제막한 3m 높이의 애덤 스미스 동상(왼쪽)과 1759년 발행된 『도덕감정론』.

스미스는 『도덕감정론』 에서 남들과 공감하는 인간의 능력이 궁극적으로 사회 도덕을 구축하게 되는 과정을 해부했다.

전문가들은 “『도덕감정론』을 읽지 않으면 『국부론』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고까지 말한다. 버락 오바마 미 대통령 당선인은 이 책을 자신에게 가장 중요한 책 중 하나로 꼽았다.

옥스퍼드대는 『도덕감정론』 250주년 학술회의를 6~8일 개최했다. 옥스퍼드대를 시발로 올해는 스미스에 대한 각종 연구 모임이 세계 곳곳에서 예정돼 있다. 스미스는 일반인에게 생소할 수 있기에 가상 인터뷰 형식을 빌려 그의 사상과 생애를 생각해 봤다.

-자본주의의 탐욕이 불러왔다는 지금의 세계 경제위기에 선생도 책임이 있나.
“나는 지난 30년간 시장지상주의자의 포로였다. 앨런 그린스펀(1987~2006년 미 연방준비제도이사회 의장)은 2005년 내 고향인 영국 스코틀랜드 커콜디를 방문해 “『국부론』은 인류 지성사의 가장 위대한 업적 중 하나”라고 치켜세웠다. 그린스펀을 비롯한 극단적 시장주의자는 『국부론』을 흔들며 위태위태한 자유방임주의적 정책을 폈다. 그러나 나는 자유방임(laissez-faire)이라는 말 자체를 사용한 적이 없다.”

-우파뿐만 아니라 좌파도 선생에게 구애하고 있는데.
“그렇다. 좌파인 노엄 촘스키 MIT 교수는 ‘스미스가 시장을 지지한 이유는 시장이 평등을 가져올 것으로 믿었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나와 동향인 영국의 고든 브라운 총리는 2006년 내가 노동당을 지지할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사실 내 사상에는 좌파 취향에 맞는 요소도 많다. 나는 정부가 계약ㆍ특허ㆍ저작권을 규율해야 하며 교육ㆍ인프라 제공의 의무도 있다고 주장했다. 노예제와 식민주의에 반대했다. 국가가 독점적 특혜를 부여하는 것에 반대했으며 상업 세력이 사회에 미칠 수 있는 해악에 대해서도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그뿐만 아니라 부자와 힘 있는 자들을 사람들이 우러러보고 심지어 숭배하는 경향에 대해서도 경고했다. 나는 노조 결성의 자유와 누진소득세에 대해서도 지지하는 입장이었다. 나를 현상유지를 바라는 케케묵은 인물로 몰아세우던 좌파가 나를 끌어들이려고 하는 것 자체가 신자유주의의 승리를 의미한다는 시각도 나는 알고 있다. 어쨌든 나는 좌·우파를 떠나 항상 개인의 자유와 풍요의 편이다.”

-『도덕감정론』에서 선생은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가.
“이기심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도덕적 판단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것이다. 지극히 이기적으로 보이는 사람도 타인의 운명에 관심을 갖는다. 타인의 행복을 자기의 행복으로 삼기도 한다. 이런 공감(sympathy)의 능력이 도덕의 원천이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중립적 관망자’라는 ‘나 안의 또 다른 나’가 있다. 사람에게는 양심이 있는 것이다. 중립적 관망자는 우리의 도덕적 오류를 수정한다. 이번 경제위기의 한 원인이 도덕성의 실패라고 해도 ‘중립적 관망자’가 제 기능을 발휘하면 ‘완전한 자유의 체제(a system of perfect liberty)’, 즉 자본주의는 균형을 찾을 것이다.”

-21세기 국부(國富)의 원천은 무엇인가.
“금이나 은이 아니라 노동이 국부의 원천이라는 내 생각은 불변이다. 오늘날 무엇보다 노동의 질이 중요하며 노동의 질을 높이기 위해서는 양질의 교육이 필요하다. 나는 국가가 학비를 부담할 여력이 없는 저소득층의 교육을 책임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학생뿐만 아니라 교수진의 열성도 중요하다. 내가 글래스고대에서 공부할 때는 매일 오전 7시30분에 수업이 시작됐고 70쪽 정도의 과제물을 읽어야 했다. 1770년 옥스퍼드대로 전학을 갔는데 낮은 교육의 질에 실망했다. 당시 옥스퍼드대 교수들은 ‘가르치는 척’하는 것도 포기한 사람들이었다.”

-선생이 학술적으로 크게 성공한 요인은.
“나는 반봉건 상태의 북부 스코틀랜드와 무역과 상업이 발전한 잉글랜드 모두를 목격했다. 프랑스와 스위스를 여행하면서 영국과 대륙의 차이도 알 수 있었다. 공통점과 차이점을 한눈에 알아보는 능력은 학술적으로 큰 자산이다. 조셉 슘페터는 내 저술에 독창성이 없다고 주장했다. 나는 쉽고 설득력 있는 문체를 사용했으며 광범위한 내용을 체계적으로 다뤘다. 당시 스코틀랜드 사람들은 스코틀랜드 방언으로 글을 썼는데 나는 영어로 썼다.”

-이론과 현실의 차이를 경험한 적이 있는가.
“1778년 관세ㆍ소금세 위원으로 일할 때 밀수 방지를 위해 법적 규제를 강화했다. 『국부론』에선 ‘부자연스런’ 법에 대항하는 밀수는 정당하다고 주장한 바 있다.”

- 선생은 지금 천국에 있는가.
“사망 당시 타임스지에 실렸던 내 부고에 나와 있듯 나는 기독교 신자가 아니었다. 나는 원래 성직자가 되려고 했으나 데이비드 흄의 영향으로 신앙에서 멀어졌다. 예수에 대한 믿음이 기준이라면 나는 지옥에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남들 모르게 하는 자선에 열심이었으며 유산도 자선단체에 기부했다. 평생 결혼도 하지 않고 학문에 매진했다. 또한 ‘거리의 짐꾼도 철학자보다 지적으로 결코 열등하지 않다’고 생각한 평등주의자이기도 했다.”



애덤 스미스는
1723년 스코틀랜드 커콜디에서 유복자로 출생한 애덤 스미스는 글래스고대(1737~40)와 옥스퍼드대(1740~46)에서 수학했다. 스미스는 글래스고대 교수(1751~64년) 재직 시 『도덕감정론』(1759년)을 출간했다. 젊은 버클루 공작의 가정교사로 일하게 돼 프랑스ㆍ스위스를 방문(1763~66)한 스미스는 디드로, 볼테르 등 저명 인사와 교유했다. 귀국 후 연구ㆍ집필에 전념(1767~76년)해 『국부론』(1776년)을 발간했다. 스미스는 스코틀랜드 관세ㆍ소금세 위원(1777년)과 글래스고대 학장(1787년)을 지낸 후 1790년 에든버러에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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