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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는 싸움 절대 안 한다” … IPTV 승부수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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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6호 24면

서울 우면동 KT연구소에서 경영 구상을 하고 있는 이석채 KT 사장 내정자. 뒤로 KT의 인터넷TV(IPTV) 브랜드인 ‘메가TV’ 화면이 보인다.

‘KT, 9회 말 구원투수 투입!’
지난해 12월 9일 이석채(64·사진) 전 정보통신부 장관이 KT 사장에 내정된 다음날 한 증권사가 낸 보고서의 제목이다. 남중수 전 KT 사장의 구속으로 장기간 지속된 경영공백 상태에 마침표를 찍게 됐다는 긍정적인 내용이었다. 실제로 증시 반응은 괜찮았다. KT 주가는 지난해 12월 9일 3만3650원에서 이달 6일 4만1100원까지 올랐다가 9일 3만8750원으로 숨을 고르고 있다. 최근 한 달간 KT의 주가 상승률은 15.2%로 같은 기간 코스피 상승률(6.8%)의 두 배가 넘는다. 진창환 굿모닝신한증권 연구원은 “최근 KT 주가가 오른 것은 이석채 사장 내정 소식이 호재로 작용한 덕분”이라고 말했다. 최남곤 동양종합금융증권 연구원은 “신임 사장 내정자의 소신 있고 추진력 있는 업무 스타일에 주목하고 있다”고 말했다.

14일 취임하는 KT 이석채 사장

이석채 사장 내정자(이하 사장)는 경제기획원 예산실장, 재정경제원 차관, 정보통신부 장관, 경제수석비서관 등 요직을 두루 거친 인물이다. 그는 특히 청와대에서 오래 근무한 엘리트 경제관료이기도 하다. 1984~91년과 96~97년 청와대에서 일했다. 화려한 언변과 브리핑 실력은 정평이 나 있다. 5공 초기 전두환 대통령의 아프리카 순방을 수행할 때 과장급 공무원이면서 청와대 기자단을 상대로 기내 브리핑을 멋지게 소화해 두각을 나타냈던 일화도 있다. 그 인연으로 대통령의 눈에 들었고, 후일 청와대 근무를 하게 됐다.

정통 경제관료로 성장하면서 돌파력과 추진력을 인정받았지만 그렇다고 우격다짐으로 밀어붙이는 스타일은 아니다. 미리 전략을 세우고 논리적으로 상대방을 꾸준히 설득해 결국 상대방을 굴복시킨다는 평을 듣는다. 김영삼 정부 때 정부 부처 1급 중 가장 막강한 자리라는 경제기획원 예산실장에 중용됐고, 실타래처럼 얽힌 이해관계자를 설득시키면서 개혁 과제를 성공적으로 수행했다. 당시 예산실에서 그와 함께 일했던 안병엽 전 정보통신부 장관은 “(이 사장은) 과감한 추진력으로 재정개혁을 이끌었다. 이해관계자가 많은 특별회계나 기금을 과감하게 정비하고 통폐합해 재정 지출을 투명하고 효율적으로 만들었다”고 회상했다.

이 사장의 추진력은 주도면밀하게 전략·전술을 따진 결과로 나온 것이다. 그의 설명을 들어 보자.

“추진력은 뚝심과는 다르다. 첫째, 설득력이 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공감할 수 있는 이론을 찾아내야 한다. 둘째, 설득을 해도 넘어오지 않으면 다음은 세력싸움이다. 상대가 움직이는 방향을 예측하고, 미리 움직여 나의 세력이 훨씬 많아지도록 지지세력을 늘려야 한다. 셋째, 상대방에게 도망갈 명분을 줘야 한다. 그게 안 되면 패배한다.”(나라경제 2008년 12월호 인터뷰)

‘부총리급’ 예산실장이란 소리를 듣던 그는 94년 농림수산부 차관으로 옮겼다. 당시 이경식 부총리는 기획원을 떠나는 그에게 “국무위원이 제일 싫어하고 무서워하는 사람이 누군지 아나? 바로 자네일세. 당신이 얼마나 권력을 남용하는지 아나? 그래도 지금은 자네 같은 사람이 꼭 필요하다”며 어깨를 두드려줬다고 한다.

그는 96년 정통부 장관 시절 세계 최초로 코드분할다중접속(CDMA) 방식을 상용화했다. 국내 정보화 교육의 큰 축을 담당하는 정보화기획실을 신설하는 등 정보통신부 체질도 바꿨다. 97년 청와대 경제수석을 끝으로 공직에서 물러난 뒤 10년간을 ‘야인(野人)’으로 지냈다. 개인휴대통신(PCS) 사업자 선정과 관련, 특정업체에 유리하게 채점 방식으로 바꾼 혐의(직권남용)로 98년 기소됐다. 나중에 무죄 판결을 받았지만 그에겐 힘든 시기였다.

“53세의 한창 나이에 실직자가 된 것도 억울한데 잠시 집을 비웠더니 기자들이 집을 포위하고 난리가 났더라. 갈 곳이 없어 집사람하고 남한산성에 올라갔다. 정상에 남한산성을 증축했던 이회의 부인을 모신 사당이 있었다. 이회는 건실하게 산성을 건설했지만 공금 횡령의 누명을 쓰고 억울하게 사형당했고 아내는 자살했다. 나중에 결백이 밝혀진 뒤 세워진 사당이었다. 이를 보고 깊은 감회에 빠졌다. 최선을 다했는데 훈장을 주지 못할망정 엄청난 수모와 모욕이 돌아온 역사의 반복이었다.”(나라경제 인터뷰)

힘든 시기를 견딜 때 그는 사무실에 옛 선조의 글인 ‘능한죽(凌寒竹)’을 액자로 만들어 걸어 놨다. ‘대나무같이 어려움을 능히 견디라’는 뜻을, 쓰린 가슴에 새겼을 것이다. 하와이 등 해외에서 체류하고 귀국 후 국내 한 로펌의 고문으로 일했던 지난 10년간 그는 어떤 생각을 하면서 지냈을까. 중앙SUNDAY는 이 시기 그가 썼던 논문과 기고문 등을 집중적으로 살펴봤다.

관료 출신이면서도 유연한 자유기업주의 체제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는 점이 눈에 띈다. 그가 정통부 장관 재임 시절의 치적으로 꼽는 것 중 하나가 통신장비산업의 눈부신 성장이다. 존재하지도 않던 산업을 어엿한 수출 산업으로 키워낸 정부 주도 산업정책의 성공작이었다. 당시 산업정책을 주물렀던 그가 이런 글을 썼다. 묘한 울림이 있는 내용이다.

“정치가 경제를 지배하거나 산하(傘下)에 두려는 시도를 제도적으로 봉쇄함으로써 정부의 책임인 정책적이고 제도적인 것 이외에는 경제가 정부나 정치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 어떤 경우에도 금융기관 인사나 활동에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해서도 안 되고, 하려고 시도해서도 안 된다. 공기업의 장도 주주 대표가 선발하도록 하고 그들이 주주에게 책임지는 제도로 바꿔야 하지, 정권만 바뀌면 책임자를 바꾸는 현재의 방식은 청산돼야 한다.

공기업을 민영화의 이름으로 굳이 재벌 소유로 전환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민영화가 유일한 대안이라면 재벌식 지배구조에 대칭되는 기업 지배구조, 즉 지배적 주주가 없는 소유구조 아래서 주주들의 위탁을 받은 경영진이 전적으로 책임을 지는 지배구조를 택해야 한다. 그리하여 재벌식 지배구조와 서로 경쟁하게 하되, 정치가 개입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대통령이 후보의 공약으로서 국민에게 굳건히 밝힘으로써 그 실천이 보장돼야 한다.”(2003년 대한발전전략연구원 발간 『자유·번영 그리고 통일을 향한 한국 경제의 선택』 중 발췌)

14일 임시 주총에서 정식 선임될 이석채 사장은 지난해 12월 11일부터 서울 우면동 KT연구소에 집무실을 마련하고 ‘열공’ 모드에 돌입했다. KT 내부에서 ‘인수위원회’로도 불리는 ‘경영디자인 태스크포스(TF)’를 출범시켜 조속한 경영정상화를 꾀하고 있다. 보통 오전 8시30분에 출근해 오후 8~9시까지 일한다. 격식을 따지지 않고 직원들과 자유롭게 토론하면서 현안을 파악하고 있다고 한다. 토론이 늦어질 때는 밤 11시 넘어 퇴근하는 날도 많다는 게 TF 관계자의 전언이다.

이 사장은 야인 시절 LG전자·SK· C&C·두산중공업·코오롱유화의 사외이사를 경험했다. 비록 최고경영자(CEO) 경험은 없지만 옆에서나마 기업 경영을 지켜보는 기회가 됐을 것이다. 경제관료 출신답게 수치에도 밝다. 이미 KT 업무보고 과정에서 ‘숫자 경영자’의 면모를 보여줬다. 영국 통신업체 BT의 기업고객 현황과 KT를 비교하는 보고를 받다가 잘못된 수치를 즉석에서 잡아내기도 했다. 그는 BT 고문을 지냈다.

취임 이후 ‘이석채의 KT호(號)’가 넘어야 할 파도는 만만치 않다. 주력사업인 유선전화는 지지부진하고 인터넷TV(IPTV)와 와이브로(휴대 인터넷) 같은 신규사업은 아직 수익이 안 난다. 특히 지난해 10월 말 번호이동성 제도를 도입하면서 유선전화 가입자가 인터넷 전화로 옮겨가는 속도가 빨라지고 있다. 유선전화 매출은 지난해 3분기 9702억원에 그쳤다. 처음으로 1조원 밑으로 떨어진 것이다.

따라서 새로운 성장동력을 찾는 게 시급한 과제다. KT의 한 임원은 “사장 내정자가 가장 급선무로 생각하는 것은 성장동력을 확보하고 발상의 전환을 통해 시장과 일자리를 만드는 일”이라고 말했다.

조직 효율성부터 높여야 한다는 지적도 많다. KT 직원수는 3만6000여 명으로 1인당 매출액은 3억2000만원을 조금 넘는다. 주력사업이 유·무선으로 차이는 있지만 SK텔레콤의 24억8000만원에 비해 턱없이 적다. 안병엽 전 정통부 장관은 “KT가 성장하기 위해선 아직 남아있는 공기업 체질에서 완전히 벗어나야 한다”며 “방송-통신 융합시대에 걸맞은 회사가 되려면 조직이 유연해져야 한다”고 지적했다. 최성환 유화증권 연구원은 “10여 년 전 한국통신 사장을 맡았던 이계철 전 정통부 차관과 같은 리더십과 추진력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말했다. 이 전 차관은 김영삼 정부 말기에 KT 사장에 임명돼 정권교체 후 외풍에 시달렸지만 조직의 환골탈태를 이뤄낸 인물로 평가받는다. 취임 당시 6만5000명이 넘었던 인력을 4만8000명 선으로 줄이고, 취약 사업부문을 매각했다.

이 사장은 취임 이후 조직 개편과 인력 조정에 착수할 것으로 보인다. 그는 업무보고 과정에서 “조직 전반적으로 시스템이 방만하다. 임원 수가 너무 많다”는 반응을 보였다. 조직 개편의 방향은 현재 신사업·마케팅·네트워크 부문 등 기능별로 8실(연구소 1) 7부문 1본부인 조직체계를 개인고객·가구고객·기업고객·서비스디자인·네트워크 등 고객 유형과 기능별로 바꿀 방침인 것으로 알려졌다. 현재 상무대우를 포함해 380명에 달하는 임원 수도 상당수 줄어들 것으로 예상된다.

증시에선 이 사장 취임으로 KT와 핵심 자회사인 KTF의 합병 논의가 급물살을 탈 것으로 본다. 유·무선 융합 서비스 개발이나 조직개편 등을 통해 시너지를 낼 수 있기 때문이다. 만년 정체상태인 매출이 산술적이나마 커지는 효과도 기대할 수 있다.

앞에 소개한 나라경제 인터뷰에서 이 사장은 대통령 직속 국민경제자문위원을 징검다리로 삼아 다시 관가로 진출하는 것 아니냐는 질문에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들 얘기”라며 일축했다. 한 달 뒤 그는 관가 대신 KT 사장에 내정됐다. 어쩌면 그가 더 멀리 내다보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관측이 있다. 앞날을 위해서라도 좋은 실적을 내야 한다. KT의 9회 말 구원투수 이석채는 구원승이나 세이브를 올릴 수 있을까. 다시 그의 말이다.

“지는 싸움은 절대 하면 안 된다. 지고 나면 권위가 없어진다. 위대한 지도자냐 아니냐의 차이는 바로 그것이다. 불확실한 것을 위해 확실한 것을 지불하자면 목숨을 걸지 않으면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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