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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ek& 클로즈 업] 미술평론가 박영택이 본 김영택의 펜화 세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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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과 백, 곡선과 직선, 길고 짧은 선의 굵기로 자연과 감정을 담아내는 펜화는, 먹의 농담과 여백으로 자연의 유현한 정취를 표현해온 우리 전통 수묵화와 맥이 닿아 있습니다.

week&이 서원, 정자, 절집 등 주요 문화재와 전국의 절경을 수만번의 펜터치로 재현한 '펜화기행'을 일년 가까이 연재해 온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습니다. 이번에 그 주인공인 김영택(60) 화백의 개인전이 15일까지 서울 관훈동 학고재 아트센터에서 열리고 있습니다. 신문에 실린 그림의 원화를 포함한 40여점을 통해 김 화백의 화풍 변화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자리입니다.


창덕궁 부용정

미술평론가인 박영택 경기대 교수의 평으로 '선(線)으로 그린 선(禪)의 세계'를 소개합니다.

인류가 최초로 문자를 쓰면서 문자를 기록하는 도구로서의 펜의 역사는 시작됐다. 파피루스에 글을 쓰던 갈대나 진흙판에 글을 새기던 첨필도 이에 속한다.

서구의 경우 양피지의 출현으로 필기술은 완전히 뒤바뀌었다. 양피지는 주로 양.송아지.염소 가죽으로 만든다. 당시 필경사들은 그 양피지 위에 깃촉펜을 사용해 공들여 글씨를 새겼다. 깃촉펜이란 커다란 거위의 왼쪽 날개에서 뽑은 깃털을 여러 시간 물 속에 담가 부드럽게 만든 다음 건조시키고 뜨거운 모래로 담금질을 해 칼로 앞쪽을 잘라내 만든 펜이다. 이 펜은 고통스럽게 필사를 하는 수도원의 필경사들과 함께했다. 그것은 글씨 쓰기와 그림 그리기가 공존하는 장이었다. 그러니까 원래 서양에서 펜이란 도구는 글자와 그림을 동시에 이루어냈다. 18세기에 비로소 금속펜이 발명됐고 19세기 이래 필기도구는, 점점 개량되고 갈수록 세련돼졌다.

근대기에 접어들면서 우리의 필기구 역시 모필 대신 연필.펜이 주로 쓰였다. 침을 묻혀가면서 연필로 글씨를 쓰거나 잉크병을 앞세우고 펜으로 찍어가며 글자를 쓰던 기억이 새삼스럽다. 중학교에 들어가면 알파벳을, 악보처럼 바르게 줄이 쳐진 노트에 써내려 갔는데 이때 펜을 주로 사용했다. 형편이 나은 아이들은 '파이롯트'만년필을 썼지만 대개는 펜과 잉크를 갖고 다녔다. 그래서 늘 잉크를 엎질러 생긴 자국들이 시퍼렇게 멍든 것처럼 자리했다.

여전히 이 펜을 무기처럼 쓰는 이들이 있는데 다름 아닌 만화.삽화 등을 그리는 이들이다. 연필로 본을 뜨고 펜으로 따라 그려간 뒤 지우개로 지우고 털어낸 뒤 다시 붓이나 펜으로 수정하는 일련의 과정은 어린 시절 늘 선망의 대상이었다.

펜은 섬세하고 날카로워서 정확한 묘사, 세부적인 관찰과 정확성을 기하는 데 적합하다. 반면 온통 선으로만 이루어진 이 가늘고 얇은 그림은 엄청난 시간과 노동을 요구하는 동시에 작은 화면에 자족해야 한다. 아직까지도 펜으로만 그림을 그리는 작가들을 만난다. 아주 드물지만 말이다.

우연히 김영택의 펜화를 보면서 작품의 양과 손의 수고스러움, 치밀한 관찰과 뛰어난 묘사력 등을 맛보았다. 그림을 무척 잘 그리는 이다. 새삼 오늘날 사실적 이미지의 매력과 손의 솜씨를 접할 수 있었다. 그는 전통적인 건축물.가옥 등을 공들여 재현했다. 그것은 단순한 풍경의 소재로 한정되지 않는다. 한국인의 자연관.조경관, 생태적이고 환경친화적인 안목이 날카롭게 들어있는가 하면 건축술의 매력을 저장하고 있는 장소이기도 하다. 오랜 세월을 머금고 서 있는 그 건축물에 대한 애정과 함께 조금씩 상실돼 가는 유적, 전통에 대한 안쓰러운 마음의 배려도 들어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의 이 그림은 일종의 의식에 가까워 보인다. 그는 펜이라는 도구를 이용해 자신의 극진한 공력을 전달하고자 한다. 몸이 고통과 힘겨움을 이겨 하나의 완성된 그림을 향해 나아가는 과정이 더욱 체감되는 그런 그림이다. 어떤 종교성 같은 것을 느낀다. 반면 그 펜화가 지나치게 묘사에만 국한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아쉬움은 있다.

자신의 소묘력과 노동을 통해 드러난 그림의 세계는 적막하고 평화로워 보인다. 일종의 이상적인 세계상으로 비친다. 자신이 보고 느낀 것을 온전히 재생하는 일은 그 대상에 대한 극진한 애정, 사랑의 증거다. 펜이라는 경질의 도구를 이용해 그가 자신의 온몸을 소진시켜 그려내고 있는 이 그림 안에는 기록적인 충실함과 펜화의 매력적인 경지, 한국적인 대상의 아름다움 등이 서식하고 있다.

김영택 경기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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