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렴정치회고록>6. 박정희 대통령의 자주국방 의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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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지금의 X세대에게는 실감이 나지 않겠지만 68~70년 북한의 여러 무력도발로 우리나라의 안보긴장은 매우 높았다.그런데도 71년 3월 미국은 주한 2개 사단중 1개(7사단)를 철수했다.

박정희(朴正熙)대통령은 낙담하고 앉아있지만은 않았다.朴대통령은 곧바로 자주국방을 위한 방위산업 건설에 착수했다.70년대 방위산업사(史)는 담당비서관의 순직같은 비사(비史),수많은 시행착오,성공을 위한 피와 땀과 눈물로 점철돼 있다. 그중에서도 유도탄(미사일)의 개발은 한국인의 대표적 성공사례라고 할 수 있다.

78년 9월26일 충남서산군 서해안 안흥종합기지에서는 朴대통령을 비롯한 3부 요인과 군수뇌부,베시 주한유엔군사령관등이 눈앞에 설치된 각종 목표물을 뚫어져라 주시하고 있었다.한국이 설계.제작한 각종 유도병기가 시험발사되는 현장이었다. 대전차 로켓에 이어 다연장 로켓.로켓은 신호가 떨어지자 단숨에 5㎞를 날아 무인도 앞바다에 설치된 목표물을 때렸다.하이라이트는'백곰'이라는 이름이 붙은 장거리 지대지(地對地)유도탄.화살모양의 비행체가 불기둥을 뿜으며 수직으로 솟아올랐다.

몇분뒤에 스피커가 울렸다.“유도탄은 군산앞바다의 목표물에 명중했습니다.”관람석에서는 환호성이 터졌다.朴대통령의 얼굴에도 웃음이 번졌다.

한국은 개발착수 4년만에 평양까지 날아가는 유도탄을 갖게 됐고 세계에서 일곱번째로 유도탄을 자체 개발한 나라가 됐다.특히 68년 청와대습격 같은 북한의 도발이 있을 때 즉각 응징할 수 있는 수단을 가지게 돼 도발을 미연에 방지하는 효과도 볼 수 있게 됐다.

유도탄 개발의 첫번째 난관은 미국의 반대였다.우리가 유도탄을 개발한다는 정보를 입수하자 스나이더 주한 미국대사는 한달에 한번 같이 하는 점심식사때 나에게 강력히 항의하곤 했다.“한국이 공격형 무기를 개발하면 북한을 자극하게 된다”는 거였다.

朴대통령은 미국의 반대에 이런 논리로 맞섰고 계획을 밀고 나갔다.“북한은 프로그 미사일등 서울을 공격할 수 있는 무기를 많이 갖고 있는데 우리는 평양을 공격할 수 있는 무기가 아무 것도 없질 않은가.우리가 대응무기를 가져야 한다는 것은 군사적으로 상식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유도탄을 개발하려면 미국으로부터 기술을 받아야 했다.그래서 나온 것이 사거리(射距離)타협안이다.개발을 주도한 국방과학연구소(ADD)는 스틸웰 주한유엔군사령관과“사거리 1백80㎞,탄두중량 1천파운드까지만 개발할 수 있다”는 합의서를 교환했다.1백80㎞라면 휴전선에서 평양까지의 직선거리다.

그런대로 기술과 장비를 제공하던 미국은 76년 우리의'실력'을 목격하고는 또다시 우리의 발목을 잡으려 했다.그해 12월2일 대전에서는 유도탄을 국산화하는 기계창이 준공됐다.

이날 준공에 맞춰 미사일 기능에서 제일 중요한 추진제 점화시범이 있었다.직경 30㎝ 정도의 추진제는 10여초동안 장쾌한 황적색 불기둥을 뿜으며 멋있게 타들어갔다.흐뭇한 성공이었다.

朴대통령을 비롯한 참관자들은 대부분 만면에 웃음을 지었지만 안색이 변한 이가 한 사람 있었다.미 합동군사고문단장 스트리트 소장이었다.그는 미국의 유명한 유도탄 개발처인 헌츠빌 연구소 소장을 역임한 미사일 전문가였다.그가 긴장한 것은 우리나라가 제작한 추진제가 미 육군이 사용하는 나이키 허큘리스 유도탄의 추진제보다 한단계 발전한 것이었기 때문이다.허큘리스의 추진제는 구식이라 검은 연기가 나오는데 우리 추진제에서는 그런 연기가 없었던 것이다.그는 자신이 발견한 놀라운 사실을 바로 본국에 보고했다.

준공식이 끝나고 미 국방부 안보담당차관보 아브라모위치가 서울로 날아왔다.그는 심문택(沈汶澤)ADD소장에게 이렇게 따졌다고 한다.

“한국에서 유도탄을 개발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탄두로는 무엇을 쓰려고 그러느냐.다음 단계에서는 핵무기를 개발하려는 것 아니냐.” 아브라모위치 차관보가 돌아간 뒤 미국은 우리 국방부에“대전기계창에 CIA요원 2명을 배치하겠다”는 서류를 보내왔다.한국은“ADD 서울본부에 미 고문관실이 있지 않으냐.그걸로 충분하다”며 버텼다.미국은 CIA요원 상주를 관철하지는 못했지만 그후부터는 더욱 심하게 감시했다.

그런 상황에서 ADD 요원들은 휴일도 없이 유도탄 개발에 열을 올렸다.78년 4월 제1호가 시험 제작됐으며 9월초 제8호까지 나왔다.성능은 제3호부터 성공적이었다.

그해 9월26일 발사된 미사일은 외국제 부품이 유압장치 하나뿐이어서 완전 국산품이라고 할 수 있다.이 유압장치는 수량이 적어 국산화하는 것이 비경제적이어서 개발하지 않았던 것이다. 정리=김진 기자

◇이 회고록은 제1회부터 중앙일보 인터넷신문(주소 www.joongang.co.kr)에도 연재되고 있습니다.

<사진설명>

78년 9월26일 충남 서해안 안흥기지에서 열린 국산미사일'백곰'시험발사에서

박정희 대통령이 창공으로 솟구치는 미사일(원내)을 지켜보고

있다.국산미사일은 71년부터 시작된 한국방위산업의 백미였다.朴대통령은

미국의 견제를 뚫고 이를 밀어붙였다. [중앙포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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