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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고장유래>여의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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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9면

서울 여의도가 지금은 국회를 비롯,증권감독원.방송3사.63빌딩.아파트등이 들어선 번화가(?)로 변했지만 60년대 후반까지만 해도 모래섬에 불과해 글자 그대로'네섬'다시말해'너나 가질 섬'이라 부른데서 현재의 이름이 붙여졌다.여의도는'나의주(羅衣洲)'또는'잉화도(仍火島)'라고도 불렸는데,1860년대까지만 해도 큰물이 나야 당시'가산(駕山)'이라 불리던 밤섬과 갈라질 정도로 잇닿아 있었다.여의도란 이름이 공식적으로 사용된 것은 영조때의 한성부 여의도계(契)가 처음으로 이로 미뤄 전부터 마을이 있었음을 알수 있다.이곳에는 목장이 있어 사축서(司畜署).전생서(典牲署)관리가 상주하고 있었는데 현재 국회의사당이 자리잡은 곳은 섬에서 가장 높다해서 양과 말을 기른 탓에 '양말산'이라 불렸고,나머지 들판은 그냥'안양말벌(內養馬伐)'이라 했다.일제초 일본인 아라이(荒井初太郎)가 국회의사당 앞쪽에 젖소목장을 만들어 젖소와 함께 러시아산 말을 들여와 키우다 을축년(1925)대홍수때 말 40여마리를 떠내려 보낸 일도 있었다.지금도 나이가 지긋한 서울토박이들에게는 여의도 하면 으레 비행장이 떠올려지게 마련인데 일제초부터 이곳이 간이비행장으로 사용되다 1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16년 활주로와 격납고를 갖추고 정식비행장이 됐다.

우리나라 최초의 비행사로“떴다 봐라”의 주인공 안창남(安昌男)이 5만여 인파가 운집한 가운데 공중곡예를 선뵌 곳도 바로 이 곳이다.

여의도비행장은 53년 휴전 뒤 국제공항으로 사용되기도 해 가요'마포종점'에도 나오듯 당시 비행장의 대명사처럼 인구에 회자됐다. 〈이만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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