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규제혁파에 임기없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역대 정부가 기회있을 때마다 말잔치로 끝낸 규제개혁이 이번만은 실천에 옮겨져야 한다는 기대속에 정부 주도 규제개혁추진작업에 시동이 걸렸다.혹시나 하고 이번에 기대를 걸어보는 것은 우선 고건(高建)총리가 취임초부터 규제혁파를 내걸었고,강경식(姜慶植)경제부총리도 한팀을 이루어 강한 실천의지를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규제개혁이 실행에 옮겨지려면 정부조직의 개혁이나 인원의 감축,그리고 법개정이라는 암초를 넘어가야 한다.이 과정에서 기존의 규제를 유지해 권한을 행사해오던 관료나 기득권을 가진 이해집단의 방해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집요하다.그래서 다른 나라의 예를 봐도 정치지도자가 웬만한 의지와 신념이 없으면 규제개혁이 성공할 가능성보다는 실패 가능성이 높았다.

여기서 예외로 꼽을 수 있는 나라가 대표적으로 뉴질랜드같은 나라다.집권당이 바뀌어도 개혁을 지속적으로 추진한다는 공감대가 여야 지도자들에게 있었다는 사실이 성공의 한 요인으로 꼽히고 있다.우리의 경우 현정부 임기말에 규제개혁을 제대로 하겠느냐는 부정적 시각을 불식시키려면 개혁에는 임기가 없다는 각오로 최선을 다해 다음 정부에도 계승되도록 해야 할 것이다.

이미 오랫동안 규제개혁을 외쳤지만 실천에 옮겨지지 못한 이유가 무엇인가.첫째로 규제의 담당주체인 정부가 규제개혁의 추진체였던 것이 문제였다.규제개혁에 관한 여론이 비등하면 서류로 피상적인 규제완화 흉내를 내거나 겉으로는 규제를 풀고 다른 규제로 다시 묶는 눈가리고 아웅식의 조치를 되풀이해 왔다.이는 정부주도의 압축성장에 대한 과신에서 비롯된 것으로 시장기능에 대한 확신이 부족한 정부관료나 부처이기주의와 관련이 있다.

두번째는 규제완화가 이루어지면 당연히 정부의 행정조직이 없어지거나 줄어들어야 하는데 인원조정이 유연하게 되지 못하다보니 효과적인 개혁이 이루어질 수 없었다.때문에 근본적인 규제개혁을 하자면 당연히 정부조직의 합리화가 병행돼야 한다는 주장이 점점 더 설득력을 얻고 있다.

셋째는 규제완화 추진기구의 체계화가 미흡하고 무엇을 진정으로 개혁해야 하는지 노력을 게을리했기 때문이다.또한 추진기구가 잠시 기능하다가 곧 유명무실해지는 자문기구였기 때문에 심의결과의 기속력도 없었다.

따라서 현시점에서는 규제개혁의 국민적 공감대가 형성돼 있기 때문에 어떻게 하면 효과적인 규제개혁을 할 수 있는지 방안을 강구하는 일만 남은 셈이다.정부가 내놓은 안은 이제까지의 추진안보다는 훨씬 조직적이고 체계적이다.규제개혁을 위한 최고 심의기구로 규제개혁추진회의를 두고 그 밑에 경제규제를 심의하는 경제규제개혁위원회를 공정거래위원회 안에 설치하고 비경제규제는 기존의 행정쇄신위원회가 맡도록 돼 있다.

우선은 민간주도로 위원을 뽑은 것도 잘 된 일이고 경제규제개혁을 재정경제원이 아닌 공정거래위원회로 이관한 것도 올바른 방향이다.이미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규제완화정책은 경쟁정책을 다루는 기구가 맡아야 한다고 권고한 바 있다.재정경제원은 산하에 너무 이해단체를 많이 거느리고 있어 규제개혁추진에는 적당치 않다.

다만 경제규제개혁위원회가 실질적으로 기능하려면 기존의 특별법에 의거한 기업규제심의위원회의 기능과 상충될지 모르니 위원회의 입법근거를 최소한 대통령령으로 격상해야 한다.이번에 결정된 국무총리훈령으로는 위상이 흔들릴 것이 확실하다.

규제개혁의 대상과 관련해 정부가 마련한 우선추진과제가 기업의 활력을 고취하고 경쟁력을 높이는데 맞춰진 것은 옳다.새롭게 과제를 발굴하기보다는 이미 연구된 과제중 가장 우선적으로 시행에 옮길 과제를 몇가지 선정해 집중적으로 추진해야 한다.그중의 한 예가 바로 기업창업절차를 반이하로 줄이거나 공장부지와 관련된 규제의 혁파나 건축관련규제개혁 등이다.한두가지라도 피부에 와닿는 개혁을 해야 개혁작업이 힘을 얻는다.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것이 항구적인 규제개혁의 시스템을 마련하는 것인데 이를 위해 가급적 빨리 규제개혁특별법을 제정해야 할 것이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