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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중앙시평

비상한 대책도 퇴로는 열어 놓아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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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정책 방향을 정할 때 두 가지 종류의 실수를 범할 수 있다. 첫째는 제시된 가설이 옳은데도 이를 무시하고 다른 방향의 정책을 채택하는 것이다. 둘째는 제시된 가설이 그른데도 이를 받아들여 그 방향으로 정책을 채택하는 것이다. 통계학에서는 이를 ‘제1종 오류(type 1 error)’ ‘제2종 오류(type 2 error)’라고 부른다.

저금리 아래서 주택과 주식가격이 급등해 소비 주도 성장이 지속되고 신종 파생금융상품 개발로 머니 게임이 진행되는 상황에서 ‘선제적 통화정책과 금융감독 강화로 거품 확대를 막아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됐었다. 그러나 정책 당국은 ‘아니다, 이는 정보통신혁명에 의한 생산성 향상으로 경제구조가 달라진(new economy) 결과이며 새로운 금융기법으로 인해 시장에서 위험 분산이 이뤄지고 있으므로 저금리 정책과 규제 완화를 지속해 호황을 장기화시켜도 된다’는 정책을 채택했다. 그 결과가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세계적 금융위기다. ‘제1종 오류’를 범한 셈이다. 반면 9·11 테러 직후 주가가 급락하자 경기가 급랭할 것을 우려해 전 세계적으로 금리를 대폭 인하해 향후 주택과 주식시장의 거품을 부추긴 것은 ‘제2종 오류’라고 할 수 있다. 경제가 지속적으로 충격을 받을 정도가 크지 않았음에도 마치 대단히 클 것이라는 가설을 받아들여 과도한 금리 인하와 이를 장기간 유지하는 정책을 채택한 것이다.

지금 전 세계는 금융위기에 대응해 전대미문의 재정 팽창과 초저금리 정책을 쏟아내고 있다. 이에서 뒤처지면 국제적으로는 마치 금융위기 극복을 위한 국제 공조에 비협조적인 것처럼, 국내적으로는 이 비상한 상황에 정부가 한가하게 앉아 있는 것으로 비판받는다.

그러나 ‘제2종 오류’의 가능성은 열려 있다. 금융시장에서 돈이 돌기 시작하는 시점에서 이는 불씨가 기름을 만나듯 강한 인플레의 압력으로 나타날 수 있으며, 이번 금융위기의 근본적 원인인 과잉 유동성 문제는 더욱 풀기 어려워질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과 유럽에서 이러한 정책을 채택하고 이것이 여론의 광범위한 지지를 받는 것은 그러지 않았을 경우 지구사회에 가져올 결과가 너무나 심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대공황을 통해서 경제위기가 어떻게 정치를 변화시키고 엄청난 재앙을 불러오게 됐는지를 체험했다. 경제난이 지속돼 희망을 잃게 되는 사람이 많아지면 잘못된 희망의 불빛을 비추며 다가가는 세력들이 나타나게 되며 사회는 이 불빛을 따라 결국 재앙의 길로 들어설 수 있다. 1930년대의 대공황은 파시즘·나치즘의 득세를 가져왔고, 제 2차 세계대전이란 엄청난 재앙을 불러왔다.

따라서 미국과 유럽의 중앙은행들이 지금과 같이 일찍이 경제학 교과서에 없던 정책들을 쏟아내는 것은 불가피한 조치라고 볼 수 있다. 제1종과 제2종의 오류 가능성을 동시에 줄일 수는 없다. 디플레이션에 의한 실질 부채의 확대와 소비 침체, 실업 증가의 악순환으로 경제 공황 가능성을 줄이는 대신 인플레이션의 가능성을 열어두는 것이 그 반대의 선택보다 낫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미국·유럽 등 주요 경제가 회복돼야 세계경제가 회복될 수 있기 때문에 국제 여론도 이를 환영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도 이를 그대로 답습하려 하는 데 있어서는 신중을 기할 필요가 있다. 미국이 과감한 금리 인하를 주도하고, 유럽과 중국·일본이 이를 따라가는 것은 신용 긴축을 막기 위해서일 뿐 아니라 그동안 과도하게 절상된 그들 환율이 수출경쟁력을 크게 위협하게 됨에 따라 환율의 약세를 유도하기 위한 의도도 있다. 개방된 자본시장에서 경쟁적 금리 인하는 환율 절하 경쟁과 같다. 지금 우리의 처지는 다르다. 환율은 오히려 과도하게 절하돼 있으며 외환시장의 불안은 지속되고 있다. 당분간 디플레이션의 가능성도 없다. 내외 금리차를 어느 정도 유지해 외화의 유입을 유도해야 경제회복이 빨리 올 수 있는 상황이다. 또 하나. 지금과 같은 비상한 상황에서는 비상한 대책을 사용해야 하나 출구와 퇴로를 열어 놓는 배려는 필요하다. 재정을 팽창시키더라도 구조적으로 경직적이 되지 않는 한시적 지출을 늘리고 유동성 공급을 확대하더라도 향후 이를 수축해야 할 때 시장에 쉽게 되팔 수 있는 채권을 위주로 해야 할 것이다.

◆약력:미국 스탠퍼드대 경제학박사, IMF 이코노미스트, 조지타운대 겸임교수, 대통령 경제보좌관, 주영국대사

조윤제 서강대 국제대학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