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시대 고려장 사실 무근 - '고려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출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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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3면

한국사의'허리'에 해당하는 고려시대의 생활상을 속속들이 파헤친 책이 나왔다.소장학자들이 모인 한국역사연구회의 중세사1분과 소속 38명이 지은'고려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전2권.청년사刊).지난해'조선시대편'에 이어 우리 선

조들의 삶을 실감나게 보여주는 동시에 그동안 잘못 알려진 역사적 사실도 바로 잡아주고 있다.

요즘 베스트셀러로 한창 읽히고 있는'한권으로 읽는 고려왕조실록'(들녘)이 주로 왕실에 초점을 맞췄다면'고려시대 사람…'은 정치.경제.사회.문화를 아우르며 고려사회와 삶 전모(全貌)에 대한 복원을 시도한다.이념대립이 사라진 세기말을 헤쳐가는'해법'을 지역.시대별 구체적 생활상에서 찾으려는 출판계의 최근 동향과 맥을 같이 한 것이다.

고려시대는 잘 알려진대로 전형적인 농업사회.당시 농민들은 백정으로 불렸다.그러나 가축을 도살하던 조선시대 천민과 달리 하루하루를 열심히 살던 양민을 뜻했다.토지의 개인소유는 물론 매매.상속.증여도 자유로웠다.

5인가족 1년 평균 수입은 쌀로 18~20섬 정도.그러나 지출이 23섬에 달해 고려 농민들은'적자'인생을 꾸려나갔다.때문에 남의 땅 소작과 농토개간에 적극적이었다.국가의 1년예산은 90여만섬.주로 관리들의 임금과 국방비.왕실재정으

로 지출됐다.반면 당시 군인들은 개인용 무기.식량을 스스로 조달하는등 어려움이 많았다.

고려에 대한 우리의 대표적 오해는 늙은 부모를 산채로 내다버렸다는 고려장.그러나 이를 입증할만한 당대 자료나 고고학 성과는 전혀 없다.오히려 부모를 공양하지 않으면 징역 2년에 처하는등 불효죄를 엄격하게 처벌했다.

호적 작성도 고려 건국 직후부터 본격화됐다.호구를 파악해 담세원을 확보하려는 목적이었다.3년에 한번씩 조사했고 누락시키거나 나이를 속이면 엄벌을 내렸다.부계뿐 아니라 모계쪽 친족도 동등한 비중으로 실었다.

또다른 오해는 문벌들만이 가문(家門)을 나타내는 본관을 가졌다는 것.그러나 일반인에게도 분명 본관이 있었다.다만 일반지역과 향(鄕).소(所).부곡(部曲)등 천민거주지역으로 구분,양민과 천민사이 신분상의 차별을 두었을 뿐이다.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동성동본 결혼금지도 고려시대에는 의미가 없었다.또 고려왕실은 필요에 따라 근친혼을 허용했다.

태조 왕건은 지방호족을 견제하기 위해 무려 29명의 왕비를 두었다.그리고 조선시대와 달리 정비.후궁의 명확한 구분도 없었고 그들이 낳은 자녀들도 차별대우를 받지 않았다.

여성들의 권익도 확실하게 보장됐다.페미니즘이 힘을 얻는 현재보다 더욱 진보적이기까지 하다.처가살이는 일반적인 형태였고 유산 또한 균등하게 분배됐다.재산균분에 따라 딸들도 제사를 맡았고 남아선호 사상도 존재하지 않았다.가문의 대를

이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없었기 때문이다.

가장 선망됐던 최고의 직업은 역시 관료.과거시험을 대비한 여름수련회도 성행할 정도였다.녹을 받은 현직관료가 3천여명,토지만 받은 실직관원도 1만4천여명에 달했다.6월과 12월 한해에 두번 인사가 있었고 출퇴근.휴가일수 엄수,공평한 업무처리등이 고과기준이었다.

또'고려시대 사람…'에는 팔만대장경.고려청자.삼국유사등의 걸출한 문화재와 왕건의 통일대업.삼별초 항쟁.상업활동등이 쉽고 자세하게 설명되고 있다.저자들은 결론적으로“고려는 내부적으로 황제국체제를 취한 자주국가”이자“불교는 물론 유교.풍수지리도 제기능을 다했던 다양성 존중의 시대였다”고 정의했다. 〈박정호 기자〉

<사진설명>

고려시대 관료들이 가까운 벗들과 시를 지으며 여가를 즐기는 모습.철저한

신분사회였던 고려시대에 관료는 최고 선망의 직업이었다.아집도

대련(雅集圖對聯)의 일부.필자 미상.호암미술관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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