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2009 문화지도, 올해의 키워드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18면

일러스트 김태현

난세의 갈망일까. 영웅이 살아온다. 현실이 팍팍해서일까. 극단의 감성이 충무로를 달군다. 출판계는 해리포터의 뒤를 이을 대작을 찾아 헤매고, 학계는 100년 전 한국의 정체성을 찾아 기억의 귀환을 준비한다. 2009년 문화계 나침반을 돌려라.

■영웅의 재조명
난세 … 영웅이 그립구나
안중근 뮤지컬·오페라, 고려‘천추태후’드라마

고난을 뚫고 난세를 이겨갈 리더십을 소망함인가. 2009년 문화계엔 ‘영웅’이란 테마가 지배적이다. 독립운동가 안중근(1879~1910) 의거 100주년을 기념해 의사의 행각과 리더십을 재조명하는 문화 콘텐트가 차례로 선보인다. 안방극장엔 여걸을 주인공으로 한 대형 사극이 속속 예정돼 있다. 문화란 대중의 욕구가 투사되는 장이다. 지금 대중이 갈구하는 것은 역경을 딛고 강해지는 리더십이다. 그러니, 문화예술계여 답하라, 강철은 어떻게 단련되었는가를.

▶ 평화사상가 안중근의 부활

2009년 문화계는 고난의 근세사에서 한 영웅을 호출했다. 1909년 10월 26일 중국 하얼빈 역에서 일제의 심장부에 총부리를 겨눈 의사 안중근. 100년 만에 문화콘텐트로 부활한 그는 투사이기에 앞서 평화사상가이고, 지사이기 이전에 고뇌하는 한 인간이다. 올 한 해 ‘단련된 영웅’의 면모가 뮤지컬·오페라·소설 등으로 차례로 변주된다.

뮤지컬 ‘영웅’이 조명하는 안중근은 성당에서의 번뇌 장면으로 요약된다. 가톨릭 신자이자 철저한 평화주의자였던 안중근에게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저격은 고뇌에 찬 선택이었다. 제작·연출을 맡은 윤호진 대표(㈜에이콤)는 “죽음을 맞이하기 직전까지 ‘동양평화론’을 저술했던 그는 인간적 고뇌를 평화사상의 대의로 극복한 인물”이라며 “민족주의를 넘어서 아시아의 공동 번영을 꿈꾸었던 그가 분열과 갈등에 처한 우리 사회에 새로운 리더십을 제시할 것”이라고 했다.

안중근의사숭모회가 제작하는 오페라 ‘대한국인 안중근’ 역시 평화주의자 안중근에 초점을 맞춘다. 지광윤 예술총감독(46·서울 로망스오케스트라 음악감독)은 지난해 12월 제작발표회에서 “민족주의나 항일보다는 안 의사의 평화정신에 초점을 맞출 예정”이라고 밝혔다. 의거 100주년을 맞아 학계와 기념사업회가 준비하는 학술행사와 논문집도 평화사상가 조명에 맞춰져 있다.


▶ 스케일은 남성, 리더십은 여성

미국 흑인 대통령은 피부색의 장벽을 깨뜨렸지만, 2009년 한국 문화계에선 성(性)의 장벽을 깬 여성 리더들이 화두다. 드라마 ‘명성황후’ 이후 오랜만에 선보이는 선 굵은 왕녀들은 ‘구중궁궐 내 모략과 암투’란 통속화된 이미지를 깬다. 호쾌한 여걸들은 남성적 권위를 넘어서 양성이 조화된 카리스마를 꿈꾼다.

21세기적 여성 리더십의 모체를 찾기 위해 역사는 천년을 거슬러 올라가야 했다. ‘천추태후’(KBS)는 고려 초기, ‘왕녀 자명고’(SBS)와 ‘선덕여왕’(MBC)은 삼국시대가 배경이다. 역사가 승자의 기록이기에, 남성의 타자(他者)가 기록될 자리가 드물었던 탓이다. 게다가 ‘섭정을 통해 폭정을 일삼은 요부’(천추태후) 등으로 폄훼되기까지 했다. 2009년판 해석은 다르다. 오히려 고구려의 옛 영토를 회복하기 위해 거란과 맞선 ‘국내 최초 여장군’으로 치켜세운다. “남성 위주의 틀을 깨고 뻗어나가려는 요즘 여성들의 욕구를 충족시켜줄”(‘천추태후’ 신창석 PD) 캐릭터인 셈이다. 이들은 남성의 보조가 아니라 주체적으로 승부하고 국가의 명운을 고민하는 리더들이다.

김헌식 문화평론가는 “대중의 상처를 보듬어야 할 불황기에 여성 리더들이 대중문화의 전면에 등장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라며 “다만 패권 지향적인 남성화된 리더십보다 ‘대장금’(MBC)의 한상궁이나 ‘주몽’(MBC)의 소서노처럼 모성에 바탕한 리더십을 어떻게 잘 구현할 지가 관건”이라고 말했다.

강혜란 기자


■포스트 해리포터

“대작을 찾아” 사활 건 출판계

2009년 문학·출판계에 던져진 가장 굵직한 화두는 ‘포스트 해리포터를 찾아라’다. 국내외 출판업자들은 해리포터의 뒤를 이을 대작을 찾아 헤매고 있다. 영국 작가 조앤 롤링의 ‘해리포터(사진)’ 시리즈는 전 세계 4억 부, 국내에서만 1300만 부 이상 팔리며 성공신화를 썼다.

지난해 황석영의 성장소설『개밥바라기별』, 김려령의 『완득이』 등이 성공하면서 국내 출판계는 ‘포스트 해리포터’에 대한 열망을 더 키웠다. 우선 김종광·김도언·김숨·손홍규·김도연 등 기성작가들이 성장소설을 발표할 예정이다.

지난해 첫선을 보인 문학과지성사 청소년문학 시리즈 ‘문지 푸른 문학’을 통해서다. 현기영의 자전적 성장소설 『지상에 숟가락 하나』도 실천문학사에서 청소년 버전으로 재출간된다. 사계절·비룡소·주니어시공사·푸른책들 등 아동물에 집중하던 기존 출판사는 물론 창비·문학동네 등 주요 문학 출판사들도 아동·청소년물의 비중을 늘릴 계획이다.

특히 한국이 주빈국으로 참가하는 ‘2009년 볼로냐 아동도서전’(3월 23~26일)은 아동·청소년물 출판의 기폭제가 될 것으로 보인다.

세계 최대 규모의 이 아동도서전에서 한국은 국내 작가와 작품을 널리 알릴 기회가 될 것이라서다.

이경희 기자


■기억의 귀환
‘과거를 되살린’ 박물관 100년

문명은 미래를 향한 사투이면서 끊임없이 과거를 현재로 불러내는 주술이다.

100년 전 우리의 ‘마지막 황제’는 조선 왕조와 그 이전 삼국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긴 역사의 문을 열었다. 1909년 11월 1일 창경궁의 양화당(사진)·명정전 등에 만든 ‘제실(帝室)박물관’이 일반에 공개된 것이다. 근대적 박물관의 효시다.

일본과 서구의 문물에 경탄한 개화파들은 이미 수년 전부터 ‘박물관’의 건립을 상소했다. 황실은 삼국·통일신라 시대 불교 예술품, 고려자기, 조선시대 도자기와 회화 작품 등을 전국에서 수집했다. 하지만 대한제국은 박물관을 통해 기억의 문을 열자마자 이듬해 미래의 문을 닫고 마는 비운의 주인공이 됐다.

올해는 우리의 근대 박물관이 100주년을 맞는 해다. 근대 문명의 의지를 갖고 불러낸 역사의 기억이 ‘박물관’으로 구체화된 것이다. 역사를 통한 근대의 기획이 한 세기를 맞는 해, ‘기억의 귀환’을 학술·문화재 분야의 2009년 키워드로 뽑았다. 국립중앙박물관(관장 최광식)은 근대 박물관 100주년을 기해 5월과 11월에 국제학술대회와 포럼을 열고 곳곳에서 박물관 축제를 연다.

한편 인간과 문명은 현재의 모습 그 자체가 인류사 진화의 박물관이다. 올해는 다윈 탄생 200주년과 『종의 기원』 출간 150주년이기도 하다.

배노필 기자


■극단의 감성
‘더 센 이야기’ 경연장 충무로

10년 전 외환위기 당시 ‘쉬리’는 한국영화 흥행사를 다시 썼다. 남북대치의 냉엄한 현실을 대담하게도 액션·멜로로 소화해 ‘타이타닉’을 앞지르는 관객을 불러모았다. 불황기일수록 ‘안전빵’의 뻔한 기획으로는 관객의 지갑을 열지 못한다. 창작자의 지향과 개성이 뚜렷한 이른바 ‘센 이야기’가 대두되는 때다.

박찬욱 감독은 ‘복수 3부작’을 모두 합한 것보다 더 센 이야기로 돌아온다. 송강호 주연의 신작 ‘박쥐(사진)’는 존경받는 신부가 흡혈귀가 되고, 친구의 아내와 불륜에 빠지는 파격적 내용이다. 올 충무로 기대작에 첫손 꼽힌 봉준호 감독의 ‘마더’ 는 범상한 모성애 드라마가 아니다. 철부지 아들을 살인죄에서 구하기 위해 이 어머니, “세상과 맞장을 뜬다”는 게 제작진의 전언이다.

이럴 때일수록 눈물은 진해야 한다. 원태연 시인의 감독 데뷔작은 ‘슬픔보다 더 슬픈 이야기’라는 제목부터 절절한 멜러 감성을 내세운다. ‘너는 내 운명’의 박진표 감독은 신작 ‘내 사랑 내 곁에’에서 루게릭 병으로 온몸이 마비되어가는 남자의 사랑을 그린다.

1980년대를 풍미했던 이현세 만화’공포의 외인구단’은 드라마 ‘2009외인구단’으로 돌아온다. 누구도 거들떠보지 않았던 열등 선수들의 인생역전 드라마야말로 이 혹독한 절망의 시기에 최적의 판타지다.

이후남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