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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화강의 기적 울산공단 ①] “정치하는 놈들은 제거 대상이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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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코노미스트이번 호부터 울산공업단지를 연재한다. 울산에는 한국을 이끄는 조선소가 있고 세계로 뻗어가는 자동차 회사가 있다. 그 외에도 크고 작은 수많은 기업이 매일 거친 연기를 뿜어낸다. 울산공단이 없었다면 오늘의 한국 경제도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1961년 울산 건설 프로젝트 발표부터 산업의 견인차가 되기까지 과정은 그야말로 한 편의 드라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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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6 당일 박정희 소장이 장도영 육군참모총장에게 보낸 친필 서한. “혁명이 불가피하니 총장이 혁명의 선두에 서 달라”는 내용이다.

2009년은 박정희 전 대통령 서거 30주년이 되는 해다. 정치사적으로 보면 한 세대가 흐르고, 그에 따른 다양한 평가와 객론들이 언론을 통해서도 이어지겠지만 그것이 이 지면의 관심 포인트는 아니다. 그러나 경제사적으로 여전히 박정희 시대가 형성해 놓은 산업 위에서 오늘날 경제성적표가 만들어지고 있다는 점을 부인할 수 없는 만큼 그 의미는 결코 과소평가할 수 없을 일이다.

중령 때 이미 ‘혁명’ 구상한 박정희 … 김용태에게 거사 자금 마련 밀명

한국의 산업화를 촉발한 경제부흥 정책이 학자들의 주장에 따라 다르기는 하지만 사실상 ‘경제개발5개년계획’에서부터 시작됐고, 그것이 박정희 정부에서 태동했다는 것은 엄연한 역사의 기록으로 남겨져 있다. 이런 점에서 박정희 서거 30년이 되는 시점에서 그 공과를 되짚어보는 작업은 경제사적 관점에서도 가치가 충분할 것 같다.

지금 세계는 자유무역협정(FTA) 등 세계 시장의 장벽을 허무는 치열한 경쟁이 전개되는 상황이다. 이럴 때 불모지에 경제부흥의 씨앗을 뿌린 정책들과 그 당시 산업화의 현장을 만들어내기 위해 뛰었던 주역들의 일면을 살펴보는 것은 경험이 주는 지혜와 국민적 에너지를 결집할 수 있는 동기부여가 된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있다.

라파엘 홀린셰드를 비롯한 세계적인 석학들은 과거를 톱밥과 같다고 했다. 이미 나무는 잘려졌다. 잘려진 나무에서 생긴 톱밥을 쓰레기로 버릴 것이냐, 화로의 연료로 활용할 것이냐는 후세대의 선택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역사는 가르침이 있다는 얘기다. 1962년에 시작된 ‘경제개발5개년계획’이 1981년 4차를 끝으로 막을 내리고 1982년부터는 명칭이 ‘경제사회발전계획’으로 바뀌어 1996년까지 제7차 경제사회발전 5개년계획으로 이어진다.

그것도 김영삼 정권의 ‘신경제 5개년계획’에 밀렸고, 그나마 7차 계획은 IMF체제로 명을 다하는 셈이 됐다. 이러한 경제부흥의 스케줄 속에서 첫 테마는 울산공업단지를 만들기까지 숨 가쁘게 격동했던 기록을 추적하는 작업이 된다. 여기서 독자들에게 필연적으로 혼란을 주게 되는 것은 정치적인 명칭 문제다.

울산공업단지 건설을 주도적으로 계획하고 행동에 나섰던 인물은 전 무임소장관이었던 김용태 당시 최고회의 경제고문이지만 공단건설 예정지를 처음 확인하고 시동을 건 시점은 1961년 12월 31일이다. 한쪽에서는 경제개발계획을 논의하고 한쪽에서는 외자유치와 공단건설을 추진한 것인데, 그렇다면 1961년을 기준으로 할 때 박정희 정부의 명칭을 ‘혁명정부’라고 할 것인지 ‘쿠데타정부’로 할 것인지 논란의 여지가 있겠다는 것이다.

물론 5·16이 쿠데타냐, 혁명이냐 하는 것은 여기서 논제가 되지 않는다. 다만 정권을 누가 잡느냐에 따라 ‘혁명’이라고 했다가 ‘쿠데타’로 수정하고, 다시 혁명이라 했다가 또 쿠데타라고 정정하면서도 정부가 여전히 개념 정리를 확실히 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 국민이 경험했기 때문에 아직도 명칭이 혼란스럽다는 얘기다.

그러나 국민의 뜻과 상관없이 특정집단인 군부의 힘으로 정권을 장악했고, 국가재건최고회의라는 하나의 기관이 3권을 장악했다면 목적이 아무리 애국적이라 해도 그것은 쿠데타로 정의한다. ‘혁명정부’가 61년 7월 15일자로 법률 제659호라는 특별조치법을 제정해 62년 1월 20일까지 정리되지 않는 구 법령은 모두 실효시킨다고 선언하고, 352건에 이르는 새 법령을 최고회의에서 신속히 통과시켰다는 자체부터가 쿠데타임을 입증하는 셈이다.

입법기관인 국회에서 제정되지 않은 법률을 기초로 해서 행한 행위는 비록 정치적 행위라 하더라도 쿠데타가 된다. 하지만 쿠데타냐 혁명이냐 하는 것은 학문 정리에 필요할 뿐 ‘빵’이냐 ‘민주’냐의 선택은 국민의 몫이라는 것이 현실적 생각이다. 먹을 것이 없어 불안에 떨고 있는 국민이 선택한 것이 빵이라면 그것은 국민의 뜻이며 그것이 ‘민주’일 수 있다는 것이다.

그 시점의 역사는 그 시점의 잣대로 평가해야 하듯이 명칭도 그 시점에 언론을 포함한 국민 모두가 호칭했던 것을 사용하는 것이 논리적으로도 맞고 시대적 분위기도 전달할 수 있겠다고 판단되기 때문에 향후 명칭은 ‘혁명정부’로 해야 할 것 같다. 울산공업단지의 처음 명칭은 ‘울산공업센터’였다.

그것은 1962년 2월 3일 전 국민의 관심 속에 역사적인 기공식을 하면서 첫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나 공업센터가 모습을 드러내기까지 혁명정부의 행보는 은밀하고 치밀하게 진행됐다. 정유공장 건설과 관련 산업의 건설을 위해서는 공장부지 정지공사와 용수, 도로, 항만축조 사업 등 지원시설이 불가피하다는 판단에 따라 기공식 이전인 1월 27일자로 각령 403호에 의거해 울산을 ‘특정공업지구’로 기습적인 공포를 해놓고 시작했다는 것이 은밀한 행보를 보여준 일면이었다.

울산공단 건설 은밀하게 진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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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공단 건설의 주역인 김용태 전 무임소장관.
그뿐 아니라 정유를 비롯한 비료, 화학, 전력 등 기간산업 건설과 부대사업을 효율적으로 추진하기 위해 각령 540호로 ‘울산특별건설국’을 3월 7일 신속히 설치한 것도 역시 철저한 보안 속에 진행시켰다.

그것은 대대로 이어온 전답 등 부동산을 내놔야 하는 주민들의 반발과 지역의 저항 등을 사전에 차단한다는 목적도 있었지만 사실상 공단 건설을 유솜(USOM·주한 미 원조사절단)이 반대하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물론 울산공단 건설은 혁명정부가 최초로 추진하는 대규모 프로젝트였고, 그 배경에는 혁명의 명분이기도 했던 정치적 안정과 공업발전을 중심으로 하는 경제재건이 담겨 있다는 것은 당연했다.

어쨌든 당초의 ‘울산공업센터’는 기공식 이후 경제개발5개년계획이 확정되면서 1973년에 이르러 산업기지 개발촉진법이 제정돼 ‘산업기지개발촉진지역’으로 명칭이 변경된다.

연도별로 경제개발5개년계획에 맞는 단계별 추진 계획이 별도로 세워지지만 명칭은 변경됐다. 그 후 1991년 1월, 정부는 ‘공업 배치 및 공장 설립에 관한 법률’을 제정했고 다시 울산공업센터를 공식적으로 ‘울산미포국가공업단지’로 명명하는 것이다. 그것이 지금에 이르고 있다.

사실 울산공업단지 건설 구상은 어느 날 갑자기 솟아오른 것이 아니었다. 공단조성은 혁명정부가 내놓은 공업입국의 첫 프로젝트가 되지만 그 이전에, 수많은 지역 중에서 특별히 울산을 선정하게 되는 것은 김용태 최고회의 경제고문이었다. 거기에는 남궁연 당시 극동해운 사장이 제공한 정보자료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김용태 고문은 일제 때 만들어진 정보자료를 보고 ‘입이 쩍 벌어지더라’고 했지만 전국경제인연합회 2대 회장을 역임했던 이정림 전 대한유화 회장도 비슷한 얘기를 하면서 김 고문의 기억을 뒷받침했다.

“왜놈들이 전쟁을 하느라고 전부 조사를 한 건데, 울산 방어진 앞바다 수심까지 다 나와 있고 아주 중요한 자료야. 세상에 그런 자료가 있을 수 있다는 걸 그때 처음 알았어요. 일종의 군사 정보나 다름없지. 해로도 다 나와 있고 바다 밑에 암초가 어디 있고 항만으로는 어디가 적합하고, 전부 다 조사가 돼 있어요. 그 당시 우리나라에 그런 게 어디 있어요, 구경도 못한 거야.”

그러나 비록 추진은 김용태 경제고문과 몇몇 경제인이 한다 하더라도 그렇게 할 수 있도록 강력한 동력을 달아 준 배경은 박정희 소장의 울분에서부터 뿌리를 찾아야 했다. 박 소장은 중령 시절 6·25를 겪으면서 북한의 남침에 밀려 대구까지 내려갔을 때, 참고 있던 분노를 토하며 그 시점에서 벌써 군부의 힘으로 쿠데타를 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내비친다.

JP(김종필)와 함께 피란길에 올랐던 당시 경주여고 국어선생 김용태 교사와 소주를 마시면서였다. 김 교사는 JP와 서울사범대학을 같이 다녔지만 JP가 다시 육사에 입학하면서 교사의 길은 김용태만 걸었다.

“자꾸 밀리고 있어! 힘이 없으니까 자꾸 밀리기만 하는 거야! 무기만이 문제가 아니야! 싸우고 있는 군인들은 기름기라곤 한 방울도 없고, 기름기가 번지르르한 것들은 쥐도 새도 모르게 전부 도망을 쳤어! 이래가지고 어떻게 전쟁을 감당하나. 오기로 되받아치면서 올라가려 해도 다리가 후들거리고 힘이 없는데 무슨 수로 전쟁을 해!”

“썩은 물은 갈아치워야”

박정희 중령은 홧김에 마시던 소주병을 집어던졌다. 안주로 집어먹던 소금도 날아갔다. 달빛에 반사되어 하얗게 반짝거리던 차돌이 소주병에 맞아 꿈틀했다. 차돌이 박혀있는 마당 주변은 뿌려진 소금과 깨진 유리조각으로 보석 밭처럼 반짝거렸다. 박 중령은 자신을 다스리느라 애를 쓰면서도 탁한 분기를 쏟아냈다.

“정신 상태를 개조하고 썩어있는 물을 갈아치우지 않는 한 이 나라의 절대빈곤은 결코 없앨 수 없어! 정신을 개조하기 위해서는 군부에서부터 빈곤타파운동을 전개해야 하고 군부가 나서야 돼!”

술잔을 함께했던 30대의 젊은 김용태 교사가 조용히 박 중령을 응시한다.

“빈곤타파는 정치권이 해야 할 일이지 군부가 나설 일은 아니지 않습니까.”

“정치권이 어디 있어. 정치가 없는데 정치권이 어디 있느냐고! 국민이 우습게 여기는 정치가 무슨 정치야! 나는 내 논리를 반박할 다른 논리를 가지고 있지 않아. 다 썩었다는 게 내 논리의 결론이고, 지금 정치를 하고 있는 놈들은 제거해야 할 대상이야!”

정치와 사회개혁에 관한 한 폴 랜거와 레온구레 같은 유명한 교수들의 저서를 박 중령보다 더 많이 읽었을 김용태지만 박 중령과 같은 무조건적인 단죄론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고 생각했던지 그는 더 이상 말을 삼갔다. 그러나 빈곤타파 주장에는 공감했다. 여기서 두 사람은 의기투합했고, 60년 초순, 중령이었던 계급장이 소장으로 바뀌어 있을 때 김용태는 일학(一鶴)에서 다시 박 소장을 만난다.

일학은 시쳇말로 물건 좋은 여아(女兒)들이 많은 곳으로 소문난 요정이었으나, 그보다는 이기붕이 머리를 올려준 여자가 마담으로 있다 해서 정객들에게는 잡담의 안줏감으로 즐겨 씹히던 집이었다. 박 소장은 시중을 들고 있던 농염한 계집아이를 내보냈다. 이기붕의 애첩이었던 마담이 화들짝 놀라서 들어왔고, 김용태 전 장관은 활달하게 웃으며 그때 분위기를 이렇게 전했다. 공화당 때 6년 반이라는 최장수 원내총무를 지내기도 했지만 그는 별명이 ‘두목’이라고 불렸을 정도로 거침없는 사나이의 풍모를 지닌 인물이었다.

“핫핫핫, 오 마담이 보기 드문 여걸이었어. 입담도 걸고. 근데 각하(박 장군)께서 시중들던 여자애를 내보내니까 마담으로서 자존심이 상했던지 눈꼬리를 탁 쳐들더니 그래. ‘우리 집 보약(여자)은 사내와 달라서 물건이 셋 정도 이상은 다 좋다. 사내는 왕성한 무기만 있으면 되지만 우리 애들은 왕릉 같은 젖무덤, 명당 같은 음절(陰節), 반팔에 휘감기는 허리가 일품 아니냐. 날것으로 먹어도 좋고 반숙을 해서 먹어도 보약이 되는데 왜 내보내느냐’ 핫핫핫. 말도 아주 잘하는 마담이고 걸쭉한 입담을 열었지만 분위기 파악을 못한 거지. 각하 눈빛이 벌써 경계선상에 들어가 있었는 걸?”

마담이 찍소리 못하고 물러나자 박 소장은 김용태를 끌어당긴다.

“군부가 결성되고 있다. 용태 너는 민간인이기 때문에 자유롭지 않나. 행동하기에 적임이다. 혁명한다. 박흥식 사장을 만나든 누구를 만나든 나중에 반드시 내가 보답할 테니 거사자금을 마련해줬으면 좋겠어. 동지들은 그게 안 돼. 힘들겠지만 애 좀 써줘. 지금부터 경제를 아는 교수와 기업인들을 은밀히 접촉해서 혁명이 성공하는 즉시 경제재건 할 수 있도록 두뇌들을 모으는 역할을 네가 해줘야겠어!”

이것이었다. 이때의 밀명으로 쿠데타에 성공하자 사실상 한국 경제를 견인했을 정도로 유능했고 훗날 기업가로서 명성을 남긴 인물들이 ‘혁명정부’에 구속되자 보다 못한 김용태 경제고문은 과격한 주체세력이 총을 겨누면서까지 저항했지만 박 의장과 JP를 설득해 모두 석방시키는 것이다. 그는 경제재건이라는 과제와 함께 공단 건설에 필요한 주역들을 사전에 규합해야 한다는 전략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계속>

이호 객원기자·작가·leeho5233@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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