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년기획 해외석학 릴레이 기고 ⑥ 자본주의의 미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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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2008년이 저물어 가면서 많은 유럽인이 자본주의의 종말을 얘기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은 유럽에서 자본주의는 이미 1930년대에 국가주의나 조합주의에 의해-그것도 종종 난폭하게- 밀려났다가 80년대 들어 불과 몇몇 나라에서 겨우 부활한 사실을 망각하고 있다.

자본주의가 경험한 일련의 위기 중 가장 최신 사례인 이번 금융위기를 지켜보면서 자본주의의 이득이 비용보다 과연 큰 것이냐고 묻는 것은 정당하다. 카를 마르크스도 자본주의의 장점에 대해서는 감탄한 바 있지만 요즘엔 자본주의의 특장인 기업가정신이 자본주의의 파괴적 속성이 없는 다른 종류의 시스템에서도 구현될 수 있다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무엇보다 마르크스가 감탄했던 것은 그의 표현대로 자본주의의 ‘진보성(progressive)’이었다. 생산성이 올라가는한 자본주의는 뒤로 물러서지 않았다. 1820년경 금융 자본주의가 출현하면서 영국·벨기에·프랑스·독일·오스트리아 등 유럽 각국에서 차례로 생산성이 올라가기 시작했다. 이어 미국에선 더욱 빠른 속도로 생산성이 향상됐다. 당시 통계를 보면 임금도 비슷한 양상으로 올라갔음을 알 수 있다.

지금 지구촌 전역을 뒤흔들고 있는 금융위기처럼 자본주의가 치르는 가공할 비용을 생각할 때 이미 극점에 다다른 현재의 생산성을 높이기만 하는 것이 과연 의미가 있는 것인지 의문을 제기하는 견해가 적지 않다. 일견 그럴듯해 보이는 가설이긴 하지만 경험적 연구에 비추어 옳지 않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우선 유럽인들은 자본주의를 ‘자유시장’ 즉 자유방임(laissez-faire) 체제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실제로 자본주의는 아래로부터의 혁신을 받아들이는 열린 체제다. 자본주의 그 자체로는 어느 누구의 이익도 위협하지 않는다.

또 이 가설은 자본주의의 가장 명백한 이점마저 부정한다. 나보다 봉급을 많이 받는 친구들은 장래에 예상 가능한 갖가지 필요를 다 충족할 수 있을 것이다. 그들보다 덜 버는 나도 현재 내가 필요한 것 정도는 충당할 수 있다. 그러나 생산성이 오르는한 경제 전반에 걸쳐 임금은 거의 늘 오르게 돼 있다. 전반적 임금 수준 향상은 막대한 이득 창출이란 사회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그림=이성표]

생산성과 임금 수준의 향상은 사람들로 하여금 지루하고 고통스러운 노동 대신 근로 의욕을 자극하고, 의식을 확장할 수 있는 노동으로 옮겨갈 수 있게 해준다. 마르크스 시대에 있었던 ‘어두운 악마의 공장’이 사라질 수 있었던 것은 국가의 규제가 아니라 생산성 향상 때문이었다.

이 가설의 또 다른 문제점은 가설이 내세우는 자본주의의 ‘막대한’ 비용 대부분이 신기루이거나 과장됐다는 점이다. 자본주의가 잘 작동되다가도 결국엔 취약한 노동시장과 높은 실업률을 초래하고 만다는 주장은 옳지 않다. 오히려 자본주의가 촉진하는 혁신 덕분에 일자리가 창출된다. 새로운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기업이 생겨나고, 이에 수반해 마케팅과 경영의 조직과 기법이 변하면서 일자리가 계속 생겨나는 것이다.

극단적 부유층이 존재한다는 사실 때문에 서민들이 괴로워한다는 비판도 확실한 증거 없이 그럴듯한 주장만 늘어놓는 사람들이 심어놓은 환상이다. 대부분의 사람은 병원에 검진을 받으러 갈 때 자신에게 적합한 의료기기가 있는지에 관심을 가질 뿐이지 부자들을 위한 더 좋은 의료기기가 있는지 여부는 신경 쓰지 않는다. 그만큼 사람들은 실용적이다. 자본주의가 분열과 불확실을 낳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동전의 다른 면을 간과해선 안 된다. 자본주의는 새로운 상업적 아이디어를 떠올리도록 기업가들을 자극하고, 또 이를 상품화해 시장에 내놓도록 함으로써 소비자들에게는 새로운 상품을 접하는 흥분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독특한 제도다.

아마도 자본주의의 가장 뛰어난 성과는 틀에 박히고 지루한 일터를 사람의 정신을 자극하고, 문제 해결과 새로운 발견에 중점을 두는 유연한 곳으로 바꾼 점일 것이다. 애덤 스미스가 저서 『국부론』에서 핀 제조 공정을 통해 분업의 효율성을 입증한 1776년부터 헨리 포드가 대규모 자동차 공장을 세운 1920년대까지 노동자들의 머리를 무디게 만드는 조립라인은 자본주의의 상징이었다. 하지만 당시 공산주의 소련이나 사회민주주의 유럽 국가들도 일관작업 라인 없이는 경제를 굴러가게 할 수 없었던 것이 사실이다. 오늘날엔 향상된 생산성 덕분에 공장에서건 농장에서건 많은 노동자가 일관작업 라인에서 벗어나 있다.

19세기 말 유럽 국가들은 경제 운영 방식이 바뀐 데 환호했다. 그들은 이 변화가 불편함과 불안이란 대가를 요구한다는 것을 알았지만 그렇다고 고요한 과거로 돌아갈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20세기 들어 국가주의와 조합주의가 발흥하면서 기업가들의 혁신정신과 야심이 꺾이자 유럽 국가들은 의도하지 않았던 과거로 복귀하게 됐다. 유럽의 생산 현장은 과거와 같은 비능률의 덫에 빠졌다.

오늘날 몇몇 세련된 인사들은 지구온난화 대책이나 대체에너지 개발 같은 사회적 투자를 지향하는 신(新)경제에 매진하는 방식으로 기업가정신을 되살리자는 주장을 편다. 그러나 이 주장은 경제를 관료화하고, 정부 지출을 늘리며, 민간 기업들을 정부와의 계약에 묶어 놓는 문제를 안고 있다.

그 주장 자체로는 문제가 없을지라도 이를 정책화한 결과 개인들이 개방된 시장경제에 필요한 혁신능력을 상실하게 된다면 분명 문제가 있는 것이다. 이미 1930년대에 그런 문제점이 입증된 바 있다. 당시 대공황을 맞아 관료주의로 대응한 유럽 경제는 그보다 덜 관료적이던 미국 경제에 크게 뒤졌다.

2008년은 세계 경제가 거센 도전에 직면한 한 해였다. 하지만 혁신의 가치를 존중하는 나라들이라면 자본주의 체제를 굳건히 지켜나갈 것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에드먼드 펠프스(75)는 미국 예일대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고 컬럼비아대 정치경제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거시 경제정책의 장·단기 효과 간 이해 폭을 증진한 공로로 2006년 노벨 경제학상을 받았다. 컬럼비아대 ‘자본주의와 사회 센터’ 소장을 맡고 있다.

에드먼드 펠프스 미 컬럼비아대 교수 노벨 경제학상 수상
정리=강찬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