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년기획 해외석학 릴레이 기고 ⑤ 신(新)다자주의로 가는 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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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늘 그렇듯 이런 상황에서 가장 타격을 받는 계층은 빈곤층이다. 신용경색과 성장둔화는 개발도상국엔 치명타다. 지속 성장에 필요한 최소한의 교육과 의료를 제공하거나 사회간접자본에 투자할 수 없기 때문이다. 개도국으로의 해외 송금도 급격히 줄고 있다. 이미 1억 명 이상이 식료품과 유가상승으로 절대빈곤층으로 전락했다. 세계은행의 분석에 따르면 전 세계 개도국 경제성장률이 1%포인트 떨어질 때마다 2000만 명이 추가로 절대빈곤층으로 전락한다.

모든 나라가 신용경색을 완화하기 위해 금융기관을 지원하고 금리를 내리고 있다. 사회안전망을 확충하고 소비·투자를 활성화하는 정책도 추진하고 있다. 경기를 살려야 일자리를 만들고 미래의 성장기반을 확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조치들은 각국이 서로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공조할 때 가장 큰 효과를 낼 수 있다. 자기 이익을 위해 다른 나라에 해를 끼치는 경제 민족주의적 접근은 더 큰 위험을 야기한다. 지구적 도전은 지구적 차원의 해법을 요구한다.

[그림=이성표]


나는 올 10월 다자주의를 현실에 맞게 개선할 것을 주장했다. 변화하는 세계 경제를 제대로 반영하고, 국제적으로 상호 연계된 문제에 대처하기 위해서는 다자주의를 현대화할 필요가 있다. 과거의 선진 7개국(G7) 모임을 뛰어넘는 21세기형 다자주의가 대안이다. 고착되거나 정적인 위계질서가 아니라 유연한 네트워크의 역동성이 필요하다.

새로운 다자주의는 상호 의존적이면서 역할이 겹치는 공공 및 민간 부문 주역과 기관의 역량을 극대화하자는 것이다. 또 과거처럼 금융과 무역에만 집착하지 말고 경제 발전과 에너지, 기후변화, 취약 국가의 안정화 등 당면한 정치·경제적 현안을 다루자는 것이다. 국제기구의 전문성과 자원을 활용해 효과적 협력과 공동 행동을 촉진하자는 것이다.

다자주의는 건설적 행동을 통해 국가 간의 문제를 함께 푸는 수단이다. 원하는 결과를 도출하기 위해서는 광범위한 참여로 힘을 모으고 정통성을 확보해야 한다. 지난달 열린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는 글로벌 금융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처음으로 신흥 경제국들을 이해 관계자로 참여시켰다. 정상들이 훌륭한 어젠다에 합의했지만 중요한 것은 후속 조치다.

주요 선진국 지도자들이 신흥 경제국 지도자들과 자리를 함께한 것은 긍정적 진전이다. 그러나 최빈국들도 소외돼서는 안 된다. 세계가 선진국-개도국이라는 이분법적 편가르기로 간다면 위기를 해결하거나 지속 가능한 장기적 해법을 마련할 수 없다. 모든 나라가 참여하면서 지속 가능한 세계화가 목표가 돼야 한다.

선진국은 자국 금융시장 구제에 수조 달러를 쏟아붓고 있다. 반면 선진국의 대외원조는 한 해 1000억 달러에 그치고 있다. 세계는 ‘금융 구제’뿐 아니라 ‘인적(人的) 구제’도 필요로 한다. 국제사회는 최빈국에 대한 개발원조 약속을 반드시 지켜야 한다.

세계은행은 도움을 필요로 하는 나라에 대한 금융 지원을 늘리고 있다. 세계 78개 최빈국(절반은 아프리카 국가)에 대한 무상 지원이나 무이자 차관도 확대하고 있다. 선진국들은 지난해 세계은행의 최빈국 기금에 3년간 420억 달러를 제공하겠다고 약속했다. 이 돈은 2015년까지 절대빈곤과 기아를 없애고, 영아 사망률을 크게 낮추는 유엔의 밀레니엄 개발 목표를 달성하는 데 필수적이다.

또 세계은행 산하 국제부흥개발은행(IBRD)은 내년 6월 말까지 350억 달러 이상을 조성하고, 앞으로 3년간 1000억 달러까지 그 규모를 늘려 개도국을 지원할 계획이다. 이는 세계의 가난한 사람들을 보호하고, 신용이 없어 국제사회에서 돈을 빌릴 수 없는 나라를 지원하며, 장기 성장에 필요한 투자를 지속할 수 있게 해줄 것이다.

세계은행 산하 국제금융공사(IFC)도 개도국의 민간부문을 돕기 위해 앞으로 3년간 약 300억 달러를 조성할 예정이다. 이 돈으로 무역금융을 확대하고, 가난한 나라의 은행 자본을 확충하며, 유동성 위기에 처한 사회간접자본 투자를 지속할 수 있을 것이다.

아울러 세계은행은 영양 결핍과 굶주림 해소에 지속적으로 나서고, 가난한 사람에게 에너지를 계속 지원할 방침이다. 세계은행이 새로 조성한 60억 달러 규모의 기후투자펀드(CIF)는 유엔의 기후변화 협상을 돕기 위해 개도국에 경험과 실천적 기술을 제공하고, 조림사업을 확대해 나갈 것이다.

현재의 금융·경제 위기에서 벗어나려면 우리는 멀리 바라볼 필요가 있다. 오늘의 위기는 빛의 속도로 서로 연결된 세계를 반영한다. 세계화를 가능하게 한 요인들은 가난을 극복하고, 기회를 확대하며, 열린 세계로 나아가는 데에도 똑같이 기여할 수 있다. 그러나 그 혜택이 모든 사람에게 돌아가도록 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다자주의가 필요할 것이다.

◆로버트 졸릭(55)은 지난해 7월부터 세계은행 총재를 맡고 있다. 세계적 투자은행인 골드먼삭스 출신으로, 미 무역대표부(USTR) 대표와 미 국무부 부장관을 역임했다. 미 하버드대 로스쿨을 졸업했으며 이 대학의 케네디스쿨 석사다.

로버트 졸릭 세계은행 총재, 그림=이성표
정리=정재홍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