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한흠 목사가 전하는 성탄의 참뜻과 희망 메시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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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하지 말라. 세상의 절망은 진정한 절망이 아니다.”

23일 옥한흠(70·사랑의교회 원로·사진) 목사를 만났다. 꼭 1년 반만이었다. 지난해 7월, ‘한국교회 대부흥 100주년 기념대회’에서 대표설교를 맡았던 옥 목사는 교회를 향해, 목회자를 향해, 또 자신을 향해 ‘회개의 절규’를 토했었다. 그래서 절망의 환부를 향해 날아가던 그의 ‘화살’에는 ‘희망’이 번득였다. 그는 정년을 5년 앞둔 2003년, 신도 수 5만 명에 달하는 강남의 대형교회 중 하나인 사랑의교회 담임목사직을 후임 오정현 목사에게 물려줬다. 당시 옥 목사의 ‘투명한 교회 승계’는 기독교계 안팎에서 큰 화제였다. 그를 다시 찾았다. 2008년 말, 경기 한파로 인한 암울한 터널의 입구에서 옥한흠 목사에게 ‘성탄의 의미’와 ‘절망 속의 희망’을 물었다.

-12월25일, 성탄절이다. 담긴 뜻은.

“기독교 진리 중 세속적인 문화로 변형된 대표적인 예가 성탄절이다. 그러나 기독교인에겐 의미가 다르다. 하나님이 사람이 되셔서 우리와 똑같은 모습으로 찾아오신 날이다. 이게 ‘성탄절’의 키포인트다.”

-예수 오기 전과 예수 온 후, 무엇이 다른가.

“예수님 오시기 전에는 구약의 예언을 믿고 산 백성이 있었다. 그게 이스라엘 백성이다. 구약의 예언을 믿으며 신앙생활을 한 사람들이 유대인이고, 그 예언대로 오신 예수님을 믿고 신앙생활을 한 사람들이 기독교인이다.”

-그때 유대인은 왜 예수를 몰라봤나.

“구약의 메시아에는 두 가지 이미지가 있다. 하나는 아주 화려하고 영광스런 구원자의 이미지다. 또 하나는 아주 비천하고, 고난 당하는 종의 이미지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영광의 메시아’만 택했다.”

-‘예수의 나라’가 아니라 ‘유대인의 나라’를 꿈꾼 건가.

“그렇다. 사람이 보기에는 두 이미지가 서로 충돌하는 것 같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편에선 둘 다 하나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 들이다. 왜냐하면 ‘메시아’에는 영광스런 구원자와 고난의 종, 두 이미지가 함께 녹아 있기 때문이다.”

-지금은 어떤가. 우리는 행여 ‘내가 원하는 메시아의 이미지’만 취하고 있진 않나.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예수님과 우리의 관계는 오직 ‘믿음’으로 결정된다. 예수를 구세주로 믿는 자들은 과거 유대인들이 범한 실수를 반복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베스트셀러 기독교서적 『내려놓음』의 저자 이용규 선교사를 만난 적이 있다. 그는 “내 안에 내가 너무 커서 주님께서 들어올 자리가 없습니다. 주님은 탄식하시면서 옆에서 당신을 부르고 계십니다”라고 기도를 하더라. 기독교인이라도 사람마다 믿음의 수준이 다르다.

“이용규 선교사의 수준이라면 대단한 수준이다. 예수님을 믿는데도 단계가 있다. 초보적인 단계가 있고, 조금 발전한 단계가 있고, 성장하는 단계가 있고, 성숙하는 단계가 있다. 그 단계에 따라 예수님과 나와의 관계가 다르게 느껴질 수 있다. ”

-예를 들면.

“가령 결혼을 보라. 신혼도 있고, 권태기도 있고, 부부일심동체를 느끼는 성숙의 단계도 있다. 신앙도 나와 주님의 관계가 얼마나 밀접한가에 따라 달라진다. 믿음이 어린 사람은 ‘나는 예수님을 믿는다’는 믿음만으로 만족할 수도 있다. 그런데 예수님을 더 알게 되고, 예수님 말씀에 더 순종하게 되면 영적인 세계가 더 깊어짐을 알게 된다.”

-더 깊어지면.

“나의 주관이나 생각보다는 예수님의 생각, 예수님의 소원을 더 우선시하는 자리까지 갈 수 있다. 처음에는 예수님을 믿으면서 이런 복도 받고 싶고, 저런 복도 받고 싶어한다. 그런데 신앙생활이 성숙할수록 ‘이런 것도 포기하겠습니다’‘저런 것도 포기하겠습니다’가 된다. 그걸 일컬어 ‘마음을 비운다’ 혹은 ‘예수님이 내 안을 차지하도록 자리를 내준다’고 표현한다.”

-주님께 자리를 내준다니.

“나의 마음이 대부분 내 생각으로 차있다면 어떻겠나. 예수님의 생각, 예수님의 말씀이 차지할 공간은 그만큼 좁아진다. 그런데 예수님 말씀을 내 안에 간직하고, 그 말씀을 묵상하고, 그 말씀대로 순종하길 원하는 사람의 마음은 어떻겠나. 내 안에서 예수님이 차지하는 공간이 더 많아지는 거다.”

-어떤 이는 성경을 읽고, 어떤 이는 묵상과 기도를 한다.

“성경의 분량은 방대하다. 읽을 때는 읽어야 한다. 성경 구절을 내 마음에 담고 아는 정도까지 가려면 상당히 읽어야 한다. 그런데 읽기만 해서도 안 된다. 읽다 보면 자기 마음에 와닿는 구절이 있다. 그 구절을 계속 마음에 두고, 묵상하고, 반추해야 한다. 소가 풀을 뜯은 뒤 계속 되씹듯이 말이다.”

-왜 되씹는 건가.

“그걸 통해 성경 말씀에 담긴 의미를 깨닫는 거다. 그렇게 깨달은 의미를 실제 자기 삶에 적용도 해보는 거다. 그리고 필요하면 순종도 하는 거다. 그럴 때 예수님 말씀이 나의 피가 되고, 나의 살이 된다.”

-누구는 열정으로 기도하고, 누구는 침묵으로 기도한다.

“둘 다 필요하다. 열정으로 기도하는 걸 ‘부르짖는다’라고 표현한다. 성경에도 부르짖는 기도가 참 많다. 예수님도 부르짖는 기도를 하셨다. 우리의 삶이 절망에 처할 때 부르짖는 기도가 나오는 거다. 그래서 부르짖는 기도도 필요하고, 조용히 묵상하면서 하나님 앞으로 다가가는 기도도 필요하다.”

-절망의 끝자락에서 하나님을 체험하는 이들이 많다. 아브라함도 그랬고, 바울도 그랬다. 왜 그런가.

“인간이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가장 순수한 자리가 필요하기 때문 아닐까. 어린아이 같은 마음을 가진 낮은 자리, 그렇게 겸손한 자가 되기 위해서 바닥을 치는 단계가 필요한 것 같다. 바닥을 쳐야 우리는 하나님을 만날 준비가 되는 것 같다. 성경을 봐도 ”살려주시오!“하고 소리를 박박 지를 때는 우리에게 아직 힘이 남아 있을 때다. 그때는 하나님께서 가만히 내버려 두실 때가 자주 있다. 그러다가 ”살려주시오!“라는 말도 할 수 없을 만큼 기진맥진할 때, 가라앉았다 떴다를 거듭할 때 하나님이 와서 건져주신다.”

-그때를 어찌 아나.

“우리는 모른다. 중요한 건 하나님은 도와 달라고 해서 언제든지 도와주시는 분이 아니라는 거다. 우리의 유익을 위해서 언제가 가장 좋은 타이밍인가, 하나님은 그 타이밍을 맞추신다. 그런데 그 타이밍의 대부분이 절망의 끝자락에서 만난다.”

-경제가 어렵다. 살기도 어렵다. 절망의 터널 앞에서도 희망이 있나.

“물론 정부도 믿어야 하고, 지도자도 믿어야 하다. 그런데 그것이 얼마나 힘없는 갈대인지를 지금 우리가 절실하게 겪고 있지 않나. 힘들어하는 분들의 공통점이 있다. 기댈 언덕이 없다는 점이다. 그래서 절망하게 된다. 그러나 예수를 만난 자는 절망을 하려야 할 수가 없다. 그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다. 절망을 희망으로 바꿀 수 있는 능력이 있다. 진정 그를 의지하는 자는 절망이 클수록 하나님이 우리 곁에 가까이 계심을 알게 된다. 그리고 그의 음성을 듣는다.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함이니라.’

이게 하나님이 이번 성탄을 통해 우리에게 주시는 메시지다. 그 메시지 속에 희망이 있다. 그 희망을 알면 세상의 어떠한 형편도 우리를 절망으로 끌고 가진 못한다.”

글=백성호 기자, 사진=김경빈 기자

크리스마스가 주는 세 가지 축복의 의미

옥한흠 목사는 “성탄에는 세 가지 의미가 있다. 첫째는 완전한 사랑, 둘째는 아름다운 희망, 셋째는 영원한 평화”라고 말했다. 그게 바로 크리스마스가 주는 축복이라고 했다.

완전한 사랑=“하나님이 우리에게 어떻게 오셨나. 직접 인간의 몸을 입고, 종의 모습으로, 죄인의 모습으로 오셨다. 그렇게 자신을 낮추며 오셨다. 그리고 내가 신고 있는 신발을 같이 신었다. 내가 서 있는 죄인의 자리에 같이 섰다. 더 나아가서는 내가 감당해야할 죄를 대신 짊어지셨다. 우리 주위를 보라. 친구를 위해 죽는 사람도 가끔 있다. 의인을 위해서 죽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죄인을 위해 죽는 사람은 없다. 오직 예수님만이 그랬다. 이것만큼 완전한 사랑이 없다.”

아름다운 희망=“인간은 유한한 존재다. 그리고 세상은 너무 허무하다. 성경 말씀대로 세상은 수고와 슬픔이 전부다. 입에 풀칠하려고 바동바동 살다가 죽을 때는 슬픔으로 끝난다. 거기에는 절망밖에 없다. 그런데 예수님이 오심으로 우리에게 영원한 나라의 문이 열렸다. 그 나라에는 슬픔도 절망도 없다. 우리는 그곳을 향해 걸어가는 희망찬 나그네가 된 것이다.”

영원한 평화=“우리의 속을 보라. 악한 것밖에 없다. 선한 것은 지극히 적다. 그래서 우리는 죄인이고, 하나님은 거룩하다. 그러니 우리는 하나님의 손을 잡을 수가 없다. 죄인에겐 평화가 없다. 그런데 예수님이 오신 거다. 그리고 하나님의 손을 끌어다 우리의 손을 마주잡게 하셨다. 그렇게 화해를 시키셨다. 이제 예수님을 통해 우리는 영원한 평화를 소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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