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철의 사나이' 세계의 신화 되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한국 최고의 기업인 고(故)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주도, 세계은행도 한국에서 제철소는 가당치 않다고 했다. 이런 인식 속에 설립된 포스코가 40년 만에 세계 2위의 철강기업이 됐다. 그 견인차가 덩샤오핑이 수입하고 싶어 했던 철의 사나이 박태준 포스코 명예회장이다. 포스코 건설 당시 기술을 제공한 신일본제철 이나야마 회장은 “포스코는 기적”이라고 말했다.

관련사진

photo

이코노미스트 "지금도 우향우(右向右) 정신이 필요합니다. 우향우란 말하자면 사심 없이 헌신하는 것입니다. 무한경쟁, 아니 사생결단의 국제경쟁 시대일수록 기업들이 이런 우향우 정신으로 무장해야 합니다.”

박태준 포스코 명예회장 #우향우 정신으로 무에서 유 창조…사심 없는 헌신으로 제철보국 실현 #한국의 브랜드 CEO ⑮

기자가 지난 1월 중순 일본 규슈에 머물고 있던 박태준 포스코 명예회장을 찾았을 때 박 회장은 헌신성을 강조했다. 우향우 정신은 1970년대 초 박 회장이 포항제철소 건설을 밀어붙일 때 한 말에서 비롯됐다.

2006년 가을 포스코가 독자적으로 개발한 파이넥스 공법을 취재하러 기자가 포항제철소를 찾았을 때 배진찬 당시 파이넥스 2공장장은 이렇게 회고했다.

“파이넥스 공장은 박태준 명예회장의 ‘우향우 정신’이 여전히 살아있는 곳입니다. 1968년 영일만의 모래 벌판에 포항제철소를 지을 당시 박태준 사장은 이렇게 말했죠. ‘만일 실패하면 전 임직원이 바로 우향우해서 저 포항 앞바다에 빠져 죽자.’”

당시 박태준은 겨울바람이 몰아치는 모래 벌판에 전 사원을 집합시켰다. 식민지배에 대한 일본의 배상금(대일청구권자금)을 포철 1기 건설에 투입하는 그의 심정은 비장했다.

“우리 조상의 혈세로 짓는 제철소입니다. 실패하면 조상에게 죄를 짓는 것입니다. 우리 목숨 걸고 일합시다. 실패하면 우향우해서 모두 영일만 바다에 빠져 죽읍시다.”

‘꿈의 기술’로 통하는 파이넥스 공법을 개발해 보라고 포스코에 권한 사람도 박 회장이다. 1992년 정계에 몸담고 있던 그는 포스코에 “고로(용광로) 없이 쇠를 만드는 신공법을 개발해 보라”고 권유했다. 21세기에는 환경문제로 고로 방식에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는 선견이었다.

포스코가 파이넥스 공법을 개발하기까지 쇳물은 고로에서만 뽑아냈다. 14세기 이래 고로 방식은 제철공법의 대명사였다. 포스코는 숱한 시행착오를 거듭한 끝에 마침내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했다.

박태준 회장에게 배우는 ‘하우 투 브랜드’

□원칙을 포기하지 마라
제철소 건설 당시 나는 건설공기 단축 및 건설단가 최소화, 부실공사 불허 등 세 가지 원칙을 세웠다.
이 원칙을 양보하지 않았기에 오늘의 포스코가 있다.

□신뢰를 얻으면 모두 얻는다
포스코를 짓는 데 필요한 기술을 일본에서 도입하기 위해 나는 일본인들의 영혼과 신뢰를 얻었다.

□사심 없이 헌신하라
포스코의 ‘우향우 정신’은 지금도 필요하다. 무한경쟁 시대가 사심 없이 헌신하는 기업인을 부르고 있다.

‘자원은 유한, 창의는 무한.’

지금도 포항제철소 구내 곳곳에 걸려 있는 박 회장 재직 시절의 표어다. 일관 제철소 건설은 자유당 정부 시절부터 다섯 번이나 시도됐지만 번번이 무산됐었다. 국내외 전문가와 언론 매체들은 불가능하다고 입을 모았다. 기업인 중 박 회장이 가장 긴밀한 관계를 맺은 고(故)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주도 한국에서 제철소는 안 된다는 입장이었다고 한다.

우리나라는 경제의 기반이 취약하다는 게 이유였다. 일본도 메이지 시대 때 시작해 실질적으로는 제2차 세계대전 후에 성공했으니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한번은 걱정이 된 이 회장이 박태준 사장을 찾아왔다. 당대 최고의 경제인에게서 인정을 받고 싶었던 박태준은 이 회장에게 1시간20분에 걸쳐 포철의 경영 현황에 대해 구체적으로 설명했다.

“우리가 제대로 하고 있는지 말씀해 달라고 했죠. 그랬더니 ‘재무구조 보면 다 알 수 있는 거 아니냐’고 하시더군요. ‘삼성도 포철 이상 빚이 있고, 현대는 아마 삼성보다 빚이 더 많을 것’이라면서…. 그렇게 인정해주니 고맙기도 하고, 자부심도 생겼죠.” 1969년 세계은행(IBRD)은 ‘한국의 종합제철소 사업은 경제적 타당성이 없다’는 보고서를 내놓았다.

박 회장이 포철 1기 건설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동분서주할 때였다. 17년 후 박 회장은 런던 출장길에 당시 IBRD 보고서를 쓴 J 자페 박사를 만났다. 그 보고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박 회장의 물음에 그는 “지금 보고서를 쓰더라도 결론은 같을 것”이라고 답했다. “다만 박태준이라는 변수의 존재를 몰랐기 때문에 잘못된 보고서가 되고 말았다”고 덧붙였다.

포항제철소는 일본 신일본제철의 기술로 지어졌다. 포철이 제철소를 단기간에 완공하자 일본 철강업계에서 한국에 너무 많은 기술을 넘겨준 게 아니냐는 소리가 나왔다. 그러자 이나야마 신일본제철 회장이 “많이 가르쳐준 게 아니라 그 사람들이 워낙 잘한 것”이라고 일축했다고 한다. 게이단렌(經團連) 회장도 맡고 있던 이나야마는 당시 일본 사회에서 천황 못지않은 위세를 떨쳤다.

“실패하면 바다에 빠져 죽자”

1978년 여름 중국의 실권자 덩샤오핑이 신일본제철을 찾았을 때의 일이다. 그는 “중국에 포철 같은 제철소를 지어달라”고 신일본제철 측에 요청했다. 이나야마 회장은 정중하게 거절했다. “제철소는 사람이 짓습니다. 박태준 같은 인물이 없으면 포철 같은 제철소는 지을 수 없습니다. 포철은 기적입니다.”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덩샤오핑은 “그렇다면 박태준을 수입하면 되겠군요”라고 응수했다고 한다. 87년에 작고한 이나야마는 생전에 박태준에게 이 이야기를 전한 후 “중국이 당신을 납치할지 모른다”고 조크를 했다. 박태준은 아버지뻘이었던 이나야마와 국적과 세대를 뛰어넘은 깊은 유대를 맺었다.

함께 차로 이동할 때면 박태준이 이나야마에게 가사를 적어주면서 미리 익힌 일본의 유행가를 전수했다. 그렇게 해서 “일본인들의 영혼을 얻었다”고 그는 회고했다. 포스코에 몸담고 있는 동안 박태준은 포항과 광양에 각각 연산 1000만t 이상인 제철소를 건설했다. 92년 광양 4기까지 준공되자 회장에서 물러났다.

포스코는 99년 세계 1위의 철강기업에 등극했지만 철강업계의 인수합병 붐으로 인도 미탈그룹에 1위 자리를 내준다. 월간중앙은 올해 초 오피니언 리더 100명을 대상으로 한 서베이를 통해 ‘건국 60돌 한국의 상징’을 선정했다. 박태준은 이 서베이에서 한국 경제계의 두 거두인 정주영 현대그룹 창업주,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주에 이어 경제인 상징 3위에 뽑혔다.

포스코를 떠난 지 15년. 정치에 투신해 총리까지 지냈지만 사람들은 그를 걸출한 경제인으로 기억했다. 그는 “무에서 출발한 국가 기간산업을 세계 일류기업으로 키운 것을 알아준 모양”이라고 자평했다. “사심 없이 국가에 헌신해 제철보국을 실현했습니다. 비판 받을 일은 평생 하지 않았습니다.”

박태준은 1927년 부산에서 태어나 여섯 살 때 일본으로 건너갔다. 와세다대 기계공학과 재학 중 해방을 맞은 그는 귀국 후 육군사관학교의 전신인 남조선경비사관학교에 입교한다. 여기서 그는 포스코 건설을 그에게 맡긴 박정희와 운명적으로 만난다. 박정희는 그러나 정작 5·16을 일으키면서 박태준을 배제했다. 그 이유에 대해 그는 이렇게 설명했다고 한다.

“국가적인 이유와 개인적인 이유가 있어. 국가적으로는 우리의 계획이 실패로 돌아가면 우리 군을 제대로 이끌어 나갈 지도자가 필요하기 때문이지. 개인적으로는 내가 실패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면 내 처자를 돌봐달라고 자네한테 부탁하려고 했어.” 말을 마친 박정희는 담배 연기를 길게 내뿜었다. 박태준은 콧등이 시큰했다. 군 시절 청년 장교 박태준은 좌우명을 이렇게 정했다.

‘짧은 인생을 영원한 조국에. 절대적 절망은 없다.’

1963년 박태준은 정치에 참여하라는 박정희의 요청을 거절하고 소장으로 예편한다. 대한중석 사장을 맡아 1년 만에 흑자로 전환시킨 그는 41세에 포항제철 초대 사장에 취임했다. 1969년 대한국제제철차관단(KISA)의 차관이 무산된 후 박태준은 대일 청구권 자금의 잔여금을 포철 건설용으로 전용한다는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박정희는 “기막힌 아이디어”라고 무릎을 쳤다.

그해 가을 박정희는 3선 개헌으로 장기집권의 길을 연다.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이 나서 예비역 장성들을 지지 성명에 끌어들였다. 박태준은 그러나 “정치에 개입하지 않겠다”며 끝내 서명하지 않았다. 보고를 받은 박정희는 이렇게 내뱉었다고 한다. “그 친구 원래 그런 친구야. 제철소 일이나 잘하게 내버려둬.”

이듬해 2월 박정희는 박태준을 찾았다. 대통령이 포철의 공사 진척 상황을 보고받고 싶어 한다는 연락을 청와대 비서실로부터 받고 박태준은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했다. 포철 1기 설비 구매에 쓸 청구권 자금은 한·일 정부 간 협정에 따른 것이라 포철이 직접 쓸 수 없었다. 상업차관의 사용 역시 정부의 승인을 받도록 돼 있어 포철은 설비 구매의 주체로 나설 수 없었다. 정부 기관인 주일 구매소는 승인권을 내세워 포철이 선정한 업체를 거부했다. 공급업체에서 상납을 받으려는 정치인들까지 끼어들었다.

‘종이 마패’ 건넨 박 대통령

박정희는 참모들을 물리치고 박태준에게 “일은 순조롭게 되어 가느냐”고 물었다. 박태준은 설비 구매의 난관에 대해 설명하고 개선 방안을 건의했다. 심각하게 듣고 있던 박정희가 메모지를 내밀었다.

“임자, 지금 건의한 내용을 여기에 간략히 적어봐.”

박태준이 넘긴 메모지를 받아 든 박정희는 왼쪽 위 여백에 서명을 하더니 도로 내밀었다.

“임자에게 이게 필요할 것 같아. 어려울 때마다 나를 만나러 오기 쉽지 않을 테니 갖고 가.”

몇 달 전 ‘3선 개헌 지지 서명’을 거부한 박태준은 가슴이 찡했다. 박정희가 친필 서명한 이 메모지는 포스코 사사에서 ‘종이 마패’로 불린다. 제왕적 대통령이 포철의 설비 구매에 관한 전권을 박태준에게 위임한 마패와 같은 문건이기 때문이다. 박태준은 당시 정치자금도 내지 않았다. 선거 때마다 돈 나올 데가 없다고 버텼지만 박정희에게 미안한 마음이 있었다.

어느 날 보험회사에서 리베이트로 7000만원이 나왔다(박 회장은 지금 돈으로 700억원 정도는 될 거라고 했다). 제철소의 고가 설비에 대해 보험을 든 대가였다. 그는 이 돈을 들고 청와대에 들어갔다. 박정희는 “마음대로 쓰라”면서 돈을 도로 돌려주었다. 그는 제철장학재단을 만들고 각급 학교를 하나하나 세워 나갔다.

KAIST와 수위를 다투는 POSTECH(포항공대)도 그렇게 해서 설립됐다. 이대환이 쓴 박태준 평전 『세계 최고의 철강인』 에필로그에서 박태준은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일에 대해 이렇게 털어놓았다.

“북한의 원산쯤에 포스코의 제3 제철소를 짓고 싶습니다. 돈은 포스코의 국제 신인도로 마련하고, 북한 군인 천 명쯤 뽑아 포항·광양에서 훈련시키면 됩니다. 포스코엔 역전의 노병이 많아요. 한 가지 더, 북한도 대일 청구권 자금을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돈으로는 안 주고 물자를 보낼 거예요. 이 물자를 북한은 도로, 발전소, 항만, 철도 등 인프라 건설에 투자해야 합니다. 이게 현실이 되면 내가 일본에 가서 적극적인 역할도 하고 평양 가서 코치도 할 수 있을 거예요.”

포스코를 일으켜 세운 주역이자 격변기 한국 정치·경제사의 산증인인 박 회장에게 기자는 젊은 세대에 대한 조언을 구했다.

“‘영혼을 팔아서라도 취직하고 싶다’는 청년 실업자가 넘쳐난다고 합니다. 딱한 일이죠.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는 세상을 너무 쉽게 살려는 젊은이들이 많아요. 이런 젊은이들에게 경제성장, 민주화의 혜택을 그런 식으로 누리려는 건 자기 시대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고 충고하고 싶군요. ‘항상 10년 뒤 자기 모습을 그려보라’고 당부하고 싶습니다.” <연재 끝>

이필재 편집위원·jelpj@joongang.co.kr

매거진 기사 더 많이 보기

[J-HOT]

▶ 한방 노리고 뛰어든 타짜도 '개털' 만들어

▶ 이소연 "우주갔을 때 사기당한 느낌"

▶ 안락사 결정뒤 번쩍! 미언론 "천사가 살려"

▶ 800여대 임대업, 대당 매달 14억씩 챙겨

▶ 러닝 머신보다 등산이 건강에 더 좋은 이유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