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스타일리스트>육상효 감독의 '작은 영화 큰 소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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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삐삐와 전자우편의 시대에 향수어린 연애편지를 들고 나타난 이는 육상효(34·사진).한국영화 팬이라면 어디선가 그의 이름을 들어봤을 것이다.김홍준감독의 ‘장미빛 인생’에서,김유진감독의 ‘금홍아 금홍아’에서,임권택감독의 ‘축제’에서.세편 모두에서 그는 시나리오작가였고,그중 ‘장미빛 인생’은 그에게 대종상 시나리오 부문을 안겨주었다.

영화인생 이전에도 그를 기억하는 이가 있을지 모른다.소주로 끼니를 대신하면서 재능을 퍼마시던 우리 시대의 음유시인,고(故)김현식의 후반부 인생을 기록한 ‘사랑의 가객’이란 책의 저자로 말이다.그게 벌써 6년전.그가 서울대 국문과를 졸업하고 일간스포츠 연예부 초년병 기자로 일하던 시절의 얘기다.

전직 신문기자에서 영화감독으로.얼핏 화려한 전업(轉業)의 완성이 눈앞인 것같은데,그는 두렵고도 설레는 심경을 털어놓는다. “감독이 된다는게 중요한게 아니다.감독이 됐을 때 얼마나 좋은 영화를 만들 것이냐가 중요하다.” 영화 ‘주라기 공원’한편으로 번 돈이 자동차 1백만대 수출해서 번 것과 맞먹는다는 산수(算數)가 상식이 된 이후로 충무로의 신인감독이 데뷔기회를 얻기는 쉬워졌다.한다하는 대기업들이 앞다퉈 영화제작에 돈을 대겠다고 나섰기 때문이다.

뮤직비디오 뺨치는 감각적인 연출솜씨에 재기발랄한 시나리오까지 갖췄다면 금상첨화다. 소재는 뭐가 좋을까. ‘결혼이야기’이래로 청춘남녀 관객을 꽉잡고 있는 로맨틱 코미디? 김치맛 나는 한국형 액션물?

“아주 재미있는 영화를,내 방식대로 만들겠다”는 육상효감독이 골라낸 것은 스물두살 동갑내기 남녀의 사랑얘기.삼수끝에 또 대학입시에 낙방,군대갈 날을 받아놓은 록카페 죽돌이 소년과 상고졸업후 우체국에서 일하면서 틈틈이 헤르만 헤세를 뒤적이는 문학 소녀가 주인공이다.소년은 소녀를 만날 핑계삼아 받을 사람도 없는 등기우편을 부치러 우체국에 들락거리고,급기야 소녀에게 편지를 쓴다.편지? 요즘같은 세상에? 설사 편지를 쓴다 해도 꼭같은 내용을 이 여자 저 여자에게 보내다 겉봉투 이름과 편지속 이름이 뒤바뀐다는 노랫말이 나올 만큼 더블데이트가 흔해진 세태에 과연 그 사랑이 재미있을까.

“재미있고 말고요.” 그는 누구나 한번쯤 연애편지를 쓰던 심정을 되돌리게 한다.쓸 말을 고르면서 가슴 태우고,편지를 건네면서 가슴 떨리고,뒤늦게 돌아온 차가운 답장에 가슴 베이던 기억을 말이다.그 ‘떨림’의 짜릿함은 톰 크루즈가 초고속 열차에 매달린 ‘미션 임파서블’의 긴박한 순간이나,외계인 침입자들이 지구의 운명을 시시각각 위협해오는 ‘인디펜던스데이’의 장엄한 장면보다 더하면 더했지 못하진 않다.

백만장자와 거리의 여자가 사랑에 빠지는 ‘영화같은’ 줄거리는 없어도 약간은 비겁하면서도 애정어린 눈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변두리 사람들의 정서가 가장 극적이고,애절하고,통쾌할 수 있다는 것이다.그는 이런 영화를 ‘작은영화’라 부른다.자동차처럼 영화도 초대형공장에서 찍어내는 상품인 듯 보이는 이즈음에 그는 작은영화로 관객들을 저릿하게 해줄 준비를 서두르고 있다.

<글=이후남 ·사진=오종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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