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름&필링>"아니다 그건 아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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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첫번째 명제-솔직히 고백하자면 나는 왕자웨이(王家衛)의 열렬한 팬이다.그의 다섯편의 영화와 한편의 단편영화를 모두 합쳐 1백번이상 보았고,그와 인터뷰를 했고(그 자신에 따르면 생애 최장시간의 인터뷰라고 웃었다),촬영현장에 가보았고

,그리고 그가 영화를 찍은 홍콩의 몽콕과 중경의 거리까지 가서 다시 한번 확인했다.나는 그가 위대한 예술가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언제나 그의 영화를 보고 있으면 동세대의 공기를 느끼게 만든다는 점에서 패션의 제스처로 세상의 기분을'

캐치'할줄 아는 시네아티스트인 것만은 분명하다고 믿는다.

두번째 명제-나는 김의석 감독을 정확히 15년전에 만났다.두 사람 모두 학생이었다.나는 그가 그때 만들었던 단편영화'천막도시'를 마음에서부터 진심으로 사랑하는 지지자였다.그래서 장편 데뷔작'결혼이야기'를 만들었을때 나는 맹렬하게

비난했다.나는 그것이 사랑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믿는다.그는 정말로 그런 상업 코미디영화나 만들어야 할 감독이 아니었다.

반명제-그런데 지난주 시사실에서 나는 아연실색했다.김의석감독의'홀리데이 인 서울'을 보고 어디서부터 말을 꺼내야 할지 모르겠다.그 모욕적인 어휘인,'표절'이라는 말 이외에는 다른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이 영화는 왕자웨이의'중경삼림

'과'타락천사'를 절반씩 베끼고 있었다.이건 혼성모방도 아니며,오마주(homage:존경의 뜻으로 다른 작품을 흉내내어 인용하는 것)도 아니고,패러디도 아니며,번안은 더더욱 아니고,말 그대로 표절이었다.그것도 스토리와 등장인물.스타일

을 모두 베끼고 있었다.도대체 무슨 생각이었을까.

반명제의 부제-나는 매우 슬펐다.정작 나를 절망하게 만든 것은 이 영화의 시사회를 전후로 쏟아진 영화'전문기자'들의 치사한 동정론(두세개의 기사를 제외하고)과 기괴한 한국영화사랑 속에 쓰인 아전인수의 말장난들이었다.그런데도 누구나

콜럼버스의 달걀을 세울 수 있다고 주장한다.이건 야합이거나 정말로 왕자웨이 영화를 본 적이 없어서 알지 못하기때문일 것이다.그대들은 부끄러워 해야 한다.그게 한국영화를 사랑하는 우국충정에서 나온 것이라고?

나의 친구에게-나는 지금 정말로 김의석감독에게 사랑하는 마음으로 감싸 안으며 이야기하는 것이다.'홀리데이 인 서울'은 길을 잘못 들어선 것이다.정직한 이야기는 귀에 거슬리는 법이다.달콤한 거짓말을 하는 저 간사한 사람들의 이름을

잊지마라.그들은 당신의 영혼을 타락시키고 당신을'그 정도 수준'이라고 능멸하는 것이다.

누구나 실패할 수 있다.'홀리데이 인 서울'에서 중요한 것은 이 영화가 실패한 것이 아니라 반칙을 저질렀다는 것이다.친구여,그대는 인터뷰에서“왕자웨이 영화를 보고 잊었던 것을 깨달았다”고 말했다.정말로 우리가 처음 만나 영화를 이야기하던 바로 그 시절을 다시 기억하자.그때 우리는 왕자웨이 따위는 알지 못했다.거기서 다시 시작하는 당신을 만나고 싶다.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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