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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일기] 봉수씨 고향서 걸려온 전화, 하지만 귀향의 날은…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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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호 08면

17일 오후 한 중년 남자에게서 전화를 받았다. 그는 “중앙SUNDAY 12월 7일자 12면에 ‘52세 노숙자 김봉수씨, 죽음에서 안식까지’라는 제목으로 실린 무연고 시신 추적기사를 읽었다. 김봉수씨를 잘 안다”고 했다. 남자는 “기사를 수십 번 읽었는데 내가 아는 먼 친척 형님이 분명하다”고 덧붙였다. 그는 자신을 ‘의성 김씨’라고 소개하며 봉수씨도 같은 일가 사람이라고 말했다. 그러곤 고향 뒷산에 봉수씨 할머니의 산소가 있으니 그 옆에 유골이라도 묻어 주고 싶다고 했다.

봉수씨는 ‘배가 고프다’는 말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그의 영혼이 있다면 재로 변한 자신의 흔적이라도 모태의 품으로 돌아가는 것을 반겼으리라. 봉수씨의 시신은 지금 플라스틱 유골함 속 한 줌 뼛조각으로 변해 경기도 파주시 용미리 공원묘지의 납골당에 놓여 있다.

하지만 남자는 다음 날 다시 전화해 와 의향을 뒤집었다. “없었던 일로 해 달라”고 요청한 것이다. “왜 마음이 바뀌었느냐”고 묻자 그는 “노모가 ‘쓸데없는 일에 나서지 말자. 그러다가 무슨 화라도 입으면 어쩌려고 그러느냐’며 결사 반대했다”고 털어놨다. 다른 집안 어른들도 하나같이 “그만두라”며 말렸다고 전했다.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봉수씨와 같은 날 화장됐던 또 다른 ‘무연고’ 시신이 있었다. 정확하게 말하면 그는 무연고자가 아니었다. 인천에 친누나와 동생이 살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지난 20년간 만난 적이 없다”며 시신 인수를 거부했다. 하물며 친형제도 그러는 세상인데, 단지 일가에 불과한 제보자의 입장을 이해하지 못할 바가 아니다. 그는 전날 밤 마음을 바꾼 자신을 질책하느라 한숨도 자지 못했다고 했다.

봉수씨의 사망 관련 기록에 나와 있는 고향 충북 괴산군 칠성면 외사리에는 아직도 일가가 50가구나 살고 있다. 마을 100가구 중 절반이 의성 김씨일 정도로 대대로 이어온 집성촌이다. 마을에서 평생을 살아왔다는 김모(79)씨는 족보를 한참 뒤지더니 봉수씨의 집안을 기억해 냈다. 봉수씨의 아버지와 큰아버지는 서울에서 고물상을 운영해 한때 큰돈을 벌었지만, 이내 망해 고향으로 돌아왔다고 전했다. 봉수씨도 아버지와 함께 귀향해 제일 가까운 일가인 제보자의 집에 1년 반 정도 머물렀다. 이후 봉수씨는 고향을 다시 떠나 떠돌이 생활을 했다. 김씨는 “봉수 집안은 다 망했다”며 “이곳 선산에 일가의 산소가 있었지만, 지금은 모두 파내 화장한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헤르만 헤세(1877~1962)는 그의 소설 『향수(鄕愁)』에서 ‘산과 호수와 폭풍과 태양이 나의 벗이었다’며 고향의 아름다움과 그리움을 노래했다. 고향은 모든 이에게 그런 존재다. 배고프고 추울 때 고향은 더욱더 생각난다. 추위를 피해 서울역 지하도에서 새우잠을 잤을 봉수씨의 마음 한쪽에도 고향에 대한 그리움은 절실했을 것이다. 이번에 봉수씨의 귀향은 실패했다. 창고 같은 타향 납골당에 놓여 있는 봉수씨 유골이 귀향한다는 소식은 언제나 들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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