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먹는문제 썩는 문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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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서양 속담에'오늘은 수탉 내일은 깃털'이란 말이 있다.홰를 치며 목청 높이 어둠을 가를 때는 세상이라도 뒤집을 기세지만 잡아 먹히고나면 한줌 먼지털이용 깃털만 남는다는 뜻이다.칼국수이미지로 수탉같은 새벽을 열었던 김영삼(金泳三)대

통령이 부러진 개혁의 칼을 떨군채 하얗게 센 머리를 다소곳이 수그릴 때 국민은 찬비맞은 장닭을 보는듯 했다.

비는 데는 무쇠도 녹는다지만 무거운 좌절감에 눌린 국민의 마음은 아직도 풀리지 않고 있다.국민은 마치 유령선에 실려 떠내려가고 있는 느낌이다.배가 어디로 가는지, 얼마나 새고 있는지 갑판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는다.새는 배를 땜질하

듯 쉴새없이 총리와 장관을 갈아대지만 책임지는 사람은 없다.

北의 식량난 南의 부패

온나라가 그저 '몸통'만을 찾고 있다.역사 바로잡기때 전직 대통령의 몸통을 둘씩이나 벗겼지만 깃털만 남기고 담장너머로 사라진 한보의 몸통이 이 정부 아래서 드러나리라 믿는 사람이 있을까.잃은 것은 몸통이 아니라 돌이킬 수 없는 믿

음이다.깡그리 썩어 있기 때문이다.

남(南)의 썩는 문제는 북(北)의 먹는 문제와 함께 지구촌의 뉴스거리다.썩는 문제는 먹는 문제보다 나을게 없다.가난은 세계 곳곳에서 동냥이라도 들어오지만 썩는 데는 누구나 코를 막고 피한다.

국제금융시장에서 차입조건이 비싸지고 주식회사 코리아가 부도나지 않나 하는 걱정으로 거래가 끊기고 있다.원화가치가 10% 떨어져도 수출이 되레 5%나 준 것은 무엇을 말해주는가.

'몸통'만 찾고 있을게 아니라 멕시코 재판(再版)을 막아 나설 때다.권좌를 뜨면 대통령도 깃털일 뿐이다.수서(水西)의 몸통을 4년뒤에야 밝혀 감옥에 넣었지만 그보다 백배나 큰 재앙이 덮쳐온게 아닌가.그같은 점에서 몸통은 옥에 갇힌

대통령이 아니라 곤두박질한 나라의 명예요,의욕 꺾인 경제며,헤쳐나가야 할 거센 바깥바람임을 직시해야 한다.

남북한이 각기 맞닥뜨린 부패와 가난과의 전쟁은 자신과의 싸움이라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역설적인 것은 둘다 먹는 문제다.한쪽에서는 너무

먹는 권력이 등창나 있고,건너쪽에서는 뱃가죽이 등에 닿도록 못 먹어

탈이다.남에서는 누가 검은

돈을 먹다 잡혀왔느냐가 화두지만 북에선 오늘은 뉘

집에서(굶어)죽어나가느냐가 뉴스다.

요즘 미국의 서점가에는 중국의 대약진운동(1959~61)때 3천만명이

굶어죽은 사실을 추적한 책이 나와 세상을 놀라게 하고 있다.영국언론인이

폭로한 이 책의 제목은'배고픈 귀신들'이다.관심을 끄는 대목은 중국의

비극은 천재(天災)

가 아니라 정책의 실패가 빚은 인재(state-sponsored famine)였음을

기상조건등 자료를 통해 입증하고 있다.

부패 졸업이 통일 첫걸음

북의 식량난이나 남의 한보사태도 홍수나 불경기를 탓하기 전에 정책의

실패임을 부인할 사람은 없다.권력의 타락이 그같은 실정(失政)의

원인이다.썩는 문제나 먹는 문제는 결국 권력'잡는 문제'로 귀착한다.

권력에 혼(魂)을 빼앗긴 사회는 귀신이 지배한다.남쪽에서는 황금만능의

물신(物神)이 도덕률을 타고 앉아 있다.권력을 뜸들이느라 지도자가

죽은지 3년이 다 되도록 신정(神政)으로 버티는 북녘에 걸신(乞神)이 들

수밖에 없다.걸신이

든 북한의 붕괴를 기정사실로 보고 외국에서는 시나리오까지 마련하고

있는 판에 우리는 썩는 문제로 한치도 밖을 내다보지 못한다.

부패도,가난도,핵찌꺼기도 어느날 갑자기 우리가 떠맡아야 할지

모른다.분단비용은 통일비용보다 그만큼 비싸다.하지만 통일로 가는

첫걸음은 부패를 졸업하는 일이다.썩은 통일은 민족이 힘써 얻을 가치가

없기 때문이다. 최규장〈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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