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황위기를기회로>上. 고통의 터널은 길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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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경기도안양시석수동에서 10년째 약국을 경영하고 있는 손영로(孫泳魯.36)씨는 요즘 자주 짜증이 난다.하루매상이 6만원까지로 떨어지는 날이 늘어났다.1년전만 해도 하루 50만원은 너끈했다.

가장 큰 고민은'돈 되는 약'이 안 팔린다는 것.지난해 이맘때 하루에 4재꼴로 지어 팔았던 보약이 올해는 사흘 걸러 한 재도 안 나간다.스무첩들이 열흘분 녹용보약 한 재는 25만원을 받아도 보약철인 봄철이면 손님들이 줄을 섰었다.

치과병원도 마찬가지다.아픈 이를 빼러 오는'싸구려'응급환자는 여전해도 빠진 이를 해 넣으러 오는'비싼'환자는 눈에 띄게 줄었다.

불황타령은 기업만이 아니다.이제는 생활속으로까지 본격적으로 파고들고 있는 것이다.불경기에 강하다는'먹는 장사'도 요즘은 고전이다.식당매상을 좌우하는 저녁회식 손님들이 격감했기 때문이다.지난달만 해도 남강가든.가야성.반포회관등 서울

강남의 유명 음식점들이 줄줄이 폐업했다.

자동차 또한 호.불황을 가늠하는 대표적 가늠자.지난해초만 해도 승용차 한 대 사려면 3주 이상 기다려야 할 정도였다.동네마다,골목마다 주차전쟁이 벌어졌다.그러나 어느 새 형세가 역전됐다.올해 2월까지 자동차 3사의 매상은 지난해

같은 기간에 비해 무려 38% 이상 줄어들었다.

말로만 하던 불황이 드디어 본격적으로 시작되고 있는 것이다.허약해진 경쟁력 때문에 수출은 안되고 국내수요도 줄어들고 있다.기업이 돈을 못 버니 월급봉투는 얇아질 수밖에 없다.보약이나 회식,새 자동차를 찾을 형편이 못된다.

대량실업이 발생할 조짐은 비단 정리해고제 도입 때문만이 아니다.지난 1월 실업자수는 55만명,실업률은 2.4%를 넘어섰다.어떤 기업도 계속되는 적자를 이겨 낼 비법은 없다.안 팔리는 재고더미속에 채산을 못 맞추면 결국은 도산할 수

밖에 없다.<그림>처럼 불황이 심화되는 고리속에 본격적으로 들어섰다는 점에서 이제 불황은 시작이라는 것이다.

과소비가 나쁘다고 하지만 소비가 줄면 그 방면의 사업은 망할 수 밖에 없다는 사실도 감수해야 한다.술이 안 팔리면 술집종업원은 일자리를 잃게 된다.그런 징후들이 비로소 나타나고 확산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동안 우리는 불황다운 불황을 겪어 보지 못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80년 마이너스 성장때의 경제는 지금에 비교도 안될 정도로 심각한 것이었다.살인적인 물가에 대량실업.외채망국론,그리고 정치변란까지 겹치면서 한국경제가 완전히 무너지나 싶었다.

그러나 사람들이 느끼는 불황감과 갈등은 지금이 그때보다 더하다.수백억원의 적자속에 일거리를 잃은 자동차회사의 종업원들은 그 당시 잔디풀을 뽑거나 축구시합을 하며 경기회복을 기다렸다.지금은 턱도 없는 이야기다.수천억원의 적자가 쌓이

는 데도 임금투쟁과 파업사태가 벌어지는 형국이다.

고성장.과소비에 중독된 경제체질은 우리 경제의 불황 적응력을 떨어뜨렸다.95년까지 경기가 좋았을 때도 벌어들인 돈을 흥청망청 써 버렸다.경쟁력향상은 뒷전이었다.95년 우리 기업들의 설비투자중 자동화나 에너지절약등 생산성효율을 높이는데 투입한 돈의 비중은 6.1%로 일본기업들(21.4%)의 3분의 1에도 못 미쳤다.과소비바람은 수입확대로 이어지면서 사상최대의 경상수지적자(2백37억달러)를 낳았다.

이번 불황을 우리 경제의 적응력.경쟁력을 되살리는 기회로 받아들여야한다는 전문가들의 지적도 이런 배경을 깔고 하는 것이다.경제 곳곳에 숨어 있는 거품을 빼기 위해서는 불황이 더 깊어져야 한다(彭東俊 한국은행 조사2부장)는 지적도 적지 않다.

소득이 줄고 일자리를 잃는 뼈아픈 체험을 거쳐야만 우리 경제의 재건이 가능하다고 보는 견해다. 〈손병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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