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크스 묘지에서 느낀 여행자의 로망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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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호 15면

런던의 카를 마르크스 묘지 앞에는 수많은 사람들의 메모와

우리 부부가 더블린과 아일랜드인을 통해 본 것은 인생을 제대로 즐길 줄 아는 풍류가로서의 면모와 훈훈한 인간미였다. 게다가 아침부터 밤까지, 거리에서부터 공연장까지 더블린 전역에서 쉼 없이 울려대는 기타 소리와 포크 싱어가 선사하는 쾌감이란! 우리 부부는 이곳에서 보름 이상이나 체류하고도 발길을 떼지 못했다. 그러나 유럽 여행은 ‘시간과의 싸움’이다. 갈 길은 멀고, 시간은 없는 그리고 돈은 더 없는 우리는 다음 여행지인 런던으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서른셋, 서른넷’ 부부의 유럽 여행기

숙박 장소를 정할 때 스웨덴에서의 악몽을 되새김질하며 다시는 민박을 택하지 않으리라 다짐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민박의 가장 큰 장점은 아침 식사가 한식으로 제공되고, 저녁은 라면에다 김치를 먹을 수 있다는 점이다. 김치~오! 하기야 국민소득이 6만~9만 달러의 부유한 나라면 뭐하나, 주식이 빵 쪼가리인 걸.

덴마크는 주식이 샌드위치고, 스웨덴은 미트볼(한 술 더 떠 소스는 딸기잼이다!), 노르웨이는 정어 절임이다. 아일랜드도 크게 다르지 않아서 요리라곤 기껏해야 ‘하이라이스’ 정도다. 토종 한국 입맛을 가진 우리 부부는 하는 수 없이 생 라면에 고추장을 찍어 먹으며 “그래, 이 맛이야!”를 외쳤고, 그 강력한 중독증상에 하는 수 없이 고행코스인 민박집으로 다시 기어들어가야 했다.

우리가 묵게 된 런던의 한 민박집은 한국에서도 꽤 유명한 곳으로 주인아저씨 인상이 영락없이 ‘신해철 교주’였다. 나는 남편의 눈치에도 불구하고 “가수 신해철 닮았다는 소리 들으시죠?”라고 ‘입초시’를 떨었다. 계룡산 도사처럼 길게 머리를 늘어뜨린 주인아저씨의 시니컬하면서도 카리스마 넘치는 허스키 보이스! “내가 신해철보다 먼저 이 머리 했거든요. 난 누굴 따라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역시 그는 남달랐다. “내가 런던에 온 이유는 하나였어요. 카를 마르크스의 묘가 있다는 것. 요즘 젊은이들은 자신이 뭘 좋아하고, 그래서 이곳에서 뭘 봐야 하는지 모른 채 가이드북에만 의존하더군요. 런던에서 10년 넘게 살고 있는 내 말보다 어느 포털 사이트의 네티즌 의견을 더 신뢰하더군요.” 그래서 그는 이제 더 이상 가이드 역할을 해줄 수도, 해주고 싶지도 않다고 했다.

그의 씁쓸한 논평에 공감하면서도 우리는 가이드북을 버리지 못했다. 대신 가이드북에 쓰여 있지 않아 런던에 와서 아무도 보고 가지 않는다는 카를 마르크스의 묘를 두 번의 허탕 끝(하루는 길을 헤매다, 하루는 문이 잠겨)에 겨우 찾았다. 그의 묘를 눈앞에서 직면했을 때의 야릇한 기분은 런던의 버킹엄 궁전, 브리티시 박물관을 보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것이었다. 하이게이트 묘지 안 수많은 묘비 중에서도 단연 돋보이는 마르크스의 묘비 주위(마르크스의 두상이 워낙 크다)에는 수많은 쪽지와 꽃다발이 있었고 이런 문구가 쓰여 있었다. “철학자는 단지 세상을 여러 가지 방식으로 해석할 뿐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세상을 바꾸는 것이다.”

웬만한 여행객은 놓치고 간다는 마르크스의 묘를 ‘나는 보았다’는 뿌듯한 기분. 이것이 여행자의 궁극적 로망 아닐까. 나는 문득 런던에서 유학하고 있는 한 녀석이 떠올랐다. 홍대 뒷골목에서 밤새워 술을 마시고, 새벽이면 또 감자탕에 소주로 해장하며 아침을 함께 맞이했던 ‘청춘의 문장들’ 같은 친구 말이다.

사진작가이면서 그림을 그리던 친구는 서른이 넘은 늦된 나이에도 런던, 이곳에서 여전히 인생을 실험하고 있었다. 부럽고, 고마웠다. 거의 4년 만의 해후였던가. 하지만 이게 웬일인가. 지난날을 더듬는 향수 어린 나와의 수다는 고사하고 남편과 둘이서만 떠들어댄다. 취기가 오른 두 사람은 오로지 주어와 동사로만 이루어진 저급 수준의 영어 문장으로 매우 열렬히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부부 is 그때 그 시절, 용광로처럼 들끓었지만 여물지 못한 청춘의 언어를 이해해 주는 사람


철저히 자기중심적인 아내 아임(I’m)과 완전 소심하고 꼼꼼한 남편 이미리(2㎜)씨. 너무 다른 성격의 서른셋, 서른네 살 부부가 연재하는 ‘좌충우돌 부부 유럽 여행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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