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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션패션>가판대의 외설잡지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44면

'어느날 나는 친구집엘 놀러갔는데 친구는 없고 친구 누나가 낮잠을 자고 있었다.친구 누나의 벌어진 가랭이를 보자….'

화장실 벽에 씌어 있을 법한 이 구절은 80년대 초반에 씌어진 황지우의'숙자는 남편이 야속해'('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에 수록)가운데 2연이다.전체 두 연으로 이뤄진 이 시의 1연은 당시 인기 TV드라마'산유화'의 1회분 줄거리

다.1연이 TV드라마의 상투형이라면 2연은'대중오락지'의 상투형이다.

진실을 은폐하는 매스컴에 대한 항체(抗體)로서의 문학을 지향했던 황지우는 두 대중적 서사의 상투형을 누추한 알몸 그대로 진열함으로써'반(反)매스컴의 의지'를 드러낸 것이다.

놀라운 일은 이 두가지 상투형이 미디어 포화시대인 오늘에도 의연히 재생산되고 있다는 점이다.TV에서는 아내들과 남편들이 여전히 다투고 속상해하고 있으며,거리의 잡지에는 여체의 틈새로 진입하려는 노소(老少)남성들의 몸부림이 가득하다

.전자는'아줌마'들의,후자는'아저씨'들의 끈질긴 수요로 생존을 유지하고 있다.

늘상 접하는 TV드라마야 그렇다 치고,“아직도 그런 잡지가 있단 말이야?”라는 생각이 드는 사람이라면 서울역과 강남터미널의 대합실 구내 간이서점에 가보면 된다.그곳 진열대에서'사건실화''남성 25시''부부건강''대중실화''사건매거

진''충격비화''야담과 실화''현장 사건 25시'등 10여종의 울긋불긋한 잡지들을 쉽게 발견하게 될 것이다.

신체의 상당부분을 노출한 여자 사진과 신문에서라면 손톱만큼만 보도하고 지나가버렸을 성(性)관련 사건및 정보들이 지면 대부분을 채우고 있다.

이들 거리의 잡지의 공식명칭은'대중오락지'.연예인들의 가십을 주메뉴로 삼는 연예지와 구분하기 위해 잡지제작자들이 붙인 이름이다.지금은 무대에서 사라진 '명랑''아리랑''부부'등이 이들의 원조격이다(지난해 말 발행인을 달리해 다시

등장한'선데이서울'은 이들과 비교해볼 때 차라리 중후한 느낌마저 든다).한창 때는 30여종이 쏟아져 나왔다가 지금은 10여종으로 줄어들었고 잦은 창.폐간을 반복하면서도 이들은 여전히 서점의 한자리를 당당히 차지하고 있다.

대부분 월간지인 이 잡지들의 판매부수는 평균 1만부 안팎.잡지들간에

다소 편차가 있지만 주로 지방에서 인기가 높은 편이다.'사건실화'의 경우

판매부수의 90%가 지방에서 소화된다고 한다.서울의 경우 역.터미널

주변,변두리 주택가에

서 많이 팔린다.

광고수입은 거의 없지만 정규 제작인력이 3~4명정도로 비교적 적고 대개

자료 사진을 게재하며 갱지를 속지로 쓰기 때문에 1만부 정도면

충분히'남는 장사'가 될 수 있다고 한다.

이 잡지의 수요층이 남자들이라는 점은 펜팔란에 실린 이름만으로도

명백하다.'부부건강'97년3월호의 경우 펜팔 지원자 50명중 47명이

남자다.다른 잡지들도 비슷한 비율이다.그 이유는 잡지의 목차를 들춰보는

것만으로도 알 수 있다.

'성감대별 애무요령''여자의 섹스,남자하기 나름''60노인,미녀와 환상적인

섹스드림''적당한 성교횟수''여심공략법'등('사건실화'97년 2월호).여기에

앞부분 10여쪽 가량은 어김없이 관능적인 여인의 사진이

게재된다.물론'가출,무엇

이 문제인가'등 일반기사가 간혹 있지만 80~90% 정도의 지면을'성'이

차지한다.

물론 성에 관한 모든 것을 다루지는 않는다.여기서 주로 취급하는 것은

불륜.강간.변태.근친상간등 법적으로,혹은 도덕적으로'금지된

성'이다.'아름다운 로맨스'는 거의 없다.이것이 대중오락지의 첫째

특징이다.이런 글들이 상품성을 갖는

이유는 별다른 설명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성적 본능과 호기심이'규제선

침범'의 충동을 벗어날 수 없다는건 정신분석학계의 공론이다.

금기와 위반의 성에 대한 갈증은 윤리의식 결여와 교양 부재가 낳은 것은

아니라는 얘기다.이탈리아 영화의 거장 비토리오 데 시카 감독조차 “대체

부르주아 사회에서 불륜 외에 흥미로운게 뭐 있는가”라고 말한 적이

있다.

이런 잡지에 실린 글들은 대개 범죄보도기사나 세태고발의 형식을

빌린다(황지우의 시에 나오는'친구 누나' 또는'오빠 친구'와의 사건처럼

고전적 메뉴들은 주로 수기형식을 빌려 소개되지만).많은 경우 도덕적

경각심을 고취하는 어구들이

글의 말미에 첨부된다.친딸을 강간한'인면수심의 파렴치범'을 비난하기도

하고,우연히 만난 남자와 사랑 없이 하룻밤을 즐기는 젊은 여성들의

무분별한 성의식을 개탄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공자님 말씀'바로 전페이지에'헌팅에서 섹스까지'라는

제목으로 젊은 여성을 유혹하는'실전테크닉'이 자세히 소개돼

있다('남성25시'97년 2월호).

그러나 이같은 모순은 사실 제작진에도 애독자에게도 별다른 문제가 되지

않는다.기사든,수기든,정보든 이를 즐겨읽는 독자는 설교가 아니라'성적

금기의 위반'자체에서 쾌감을 느끼기 때문이다.

윤리적 수준의 극심한 표면적 불균질성과 심층적 균질성을'대중오락지'의

두번째 특징으로 꼽을 수 있다.

여기에 실린 기사와 수기들이 실화에 얼마나 가까운가 또는 얼마나

새로운가를 따지는 것은 별로 의미가 없다.잡지에 따라 실화만을 싣는

곳도 있지만 적지 않은 기사와 수기들은 관습화된 이야기의 변주와

재탕이다.독자에게 이 잡지들은 1회용 소비품일 뿐이다.

역과 터미널에서 판매부수가 높다는 것은 그 방증이다.픽션과 논픽션

구분의 무화(無化)가 대중오락지의 세번째 특징이다.

한국 대중오락지에는 한가지 특징이 더 있다.책을 펼치자마자 등장하는

요상한 자세의 여자 사진이 포르노잡지의 대용품으로도 기능한다는

것이다.“포르노전용극장 불허 방침 때문에 많은 한국 영화가

준포르노화하고 있다”는 것은 포르노전용관

허용론자의 중요한 논거이기도 한데,이는 잡지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정론지임을 자처하는 시사지들에도 간혹 작품을 빙자한 여성의 알몸

사진이 실리는 형편이니 대중오락지는 말할 것도 없다.

88년 잡지발행이 허가제에서 신고제로 바뀐 이후 3~4년간 번성하던

대중오락지는 92년부터 위축의 길을 걸어 왔다.

표면적 원인은 정기간행물윤리위원회와 여성단체들의 지속적인 제재와

비난이다.'사건실화'의 권오룡 부장은 “독자들은 더 노골적인 걸 요구해

오는데 제재에 묶여 그럴 수가 없으니 독자가 줄어들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대중오락지 퇴조의 보다 근본적 요인은 더 자극적인 사진과 이야기들이

비디오와 컴퓨터를 통해 널리 전파되고 있다는 점이다.이제 젖소부인

시리즈와 인터넷의 음란 사이트들이 대중오락지의 자리를 대체해가고 있는

것이다.

갖가지 우려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는 90년대 들어 가파른 음란화의

길을 걸어왔다.이른바 하드코어 포르노까지 집에 앉아서도 볼 수 있는

요즘의 눈으로 보면 대중오락지는 차라리 촌스럽다.

어쨌든 가릴 곳은 가리고 있는 사진 속의 여성들,요즘 책에서는 거의

쓰이지 않는 나쁜 질의 종이,거친 문장과 어수선한 편집등이 가난과

구식을 느끼게 한다.보다 세련되고 과격한'남성오락지'가 허용된다면

오늘의 대중오락지는 그 음란성 때문이 아니라 촌스러움으로만 기억될지도 모른다. 〈허문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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