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아이] 더 많은 ‘이장수’가 중국 누벼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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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국가대표팀을 집단 왕따시키는 중국인들이지만 축구 열기만큼은 대단하다. 유럽 프로리그를 꿰고 있는 젊은 팬들이 많다. 국내 프로축구 리그(中超)도 수억 명의 팬이 있다. 1994년에 시작된 중국 프로축구는 와이위안(外援)이라 불리는 외국 용병을 수혈받으며 수준이 날로 향상되고 있다.

이장수 감독은 유일한 한국인 출신 ‘와이위안 감독’이다. 그에 대한 중국 팬들의 신뢰는 대단하다. 최근 끝난 프로리그에서 이 감독이 이끈 베이징 궈안(國安)팀이 3위를 했다. 지난해보다 성적이 한 계단 떨어졌지만 팬들은 “내년에 우승하면 된다”고 오히려 이 감독을 위로했다.

시즌 마지막 경기장에는 가슴 찡한 플래카드가 한 장 나붙었다. ‘STAY! 我的李章洙(남아줘! 우리 이장수)’. 떠나지 말고 계속 팀을 이끌어 달라는 바람을 담았다. 지난해 감독으로 부임해 팀을 사상 처음 준우승에 올려놨고, 올해에도 13경기 연속 불패라는 신기록을 세운 그의 지도력을 중국 팬들이 인정한 것이다.

이 감독의 탄탄한 중국 내 입지를 지켜보면서 요즘 중국인들의 눈에 비친 한국과 한국인의 쪼그라든 위상을 다시 생각해본다. 92년 수교 직후 최고조에 달했던 한국의 이미지는 올 들어 특히 급전직하했다. 쓰촨 대지진과 베이징 올림픽 기간에 불거진 혐한증(嫌韓症)이 시간이 지나면서 사라지나 싶었는데 돌연 세계 금융위기가 엄습한 것이다. 한국 경제가 휘청거리면서 “한국이란 나라 알고 보니 별 볼일 없다”는 인상을 심어주고 있다. 한파가 닥친 한국 교민사회와 폭락한 원화가치가 장안의 우스개가 될 지경이다.

중국보다 한 걸음 앞서 있다고 자부해온 한국 대중문화도 덩달아 시들해지고 있다. 중국 언론들은 “한류(韓流)가 한류(寒流) 됐다”고 냉소를 보낸다. 상하이에서 최근 열린 한국 영화제의 객석 점유율은 40%에 불과했다. 한류 배척론도 나돈다.

이런 변화를 접하면서 한국에선 중국을 탓하는 목소리가 비등했다. 네티즌들은 중국인들의 시대착오적 대국주의와 편협한 국수주의를 맹공하기도 했다.

그러나 혐한증과 식어가는 한류의 원인을 상대에게 돌리는 것이 현명한 해법일까. 한국의 지상파 방송사들이 쏟아내는 역사 드라마를 보면 단세포 같은 민족주의에 기생하는 ‘우물 안 개구리’ 같은 작품이 적지 않다. 이런 작품들은 좁은 안방에선 먹힐지 몰라도 거대한 중화권 시장에선 설 자리가 없다. 인간의 보편적 심금을 울리는 ‘대장금’ 같은 드라마가 아니면 중국인들에게 먹히지 않는다.

재중국 한국인회가 시작한 ‘겸따마다(중국인에게 겸손하고 따뜻한 마음으로 다가가기) 운동’을 본지가 집중 보도해온 것은 남 탓을 하기 전에 스스로를 먼저 돌아보자는 자각에서 비롯됐다. 우리 선비들처럼 스스로의 옷매무새를 먼저 가다듬자는 취지였다. 한국인회의 ‘겸따마다 운동’이 알려지자 중국 주류 사회에서도 상당한 공감과 지지를 전해왔다.

미우나 고우나 한국과 중국은 앞으로도 공존해야 할 이웃이다. 가장 많은 한국 제품을 사는 고객이 바로 중국이다. 중국과 마찰 없이 공생하고 공존하는 지혜를 찾는 것은 절박한 국가적 과제다.

재중 한국상회 회장인 LG전자 중국법인 우남균 대표는 “중국에 뭔가 도움이 되고 있다는 것을 한국이 실질적으로 보여줘야 한다”고 역설한다. 한번쯤 곱씹어볼 말이다. 이장수 감독 같은 사람이 스포츠계뿐만 아니라 경제계·학계·문화계 등 중국 사회 전반에 대거 진출해 활약하는 시대가 빨리 오기를 간절히 바란다.

장세정 베이징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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