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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안 핵폐기장 르포] "이미 끝난일" "우리가 한다는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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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부안 분위기는 "핵폐기장은 끝난 일"

군수가 폭행당하고 촛불 시위속에 학생들이 41일간 등교를 거부하는 극심한 갈등끝에 정부가 '핵폐기장 전면재검토'를 발표한지 5개월이 지난 지금, 적어도 겉으로 보이는 부안은 평온한 모습이다. 군청에는 아직도 경찰이 배치돼 있고 도로변에는 '핵폐기장 반대'라고 적힌 노란 깃발이 간간히 날리는 것을 제외하면 시위로 얼룩졌던 과거를 연상하기 어렵다. 그러나 이는 겉모습일 뿐이다. 부안군청을 떠나 위도행 배가 떠나는 격포항에 가까와 질수록 반핵 깃발은 더 많이 눈에 띄었고 '핵종규(핵폐기장을 유치한 김 군수) 퇴진'이란 깃발도 적지 않았다. 격포항에서 오토바이에 반핵 깃발을 휘날리면 음식배달을 나선 한 주민은 "이미 끝난 일"이라며 "핵폐기장은 절대로 안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위도 주민이야 보상받고 떠나면 그만이지만 매일 핵폐기물을 실은 운반차량이 지나다니면 부안은 큰 타격을 받는다"고 말했다. 특히 '불멸의 이순신' 촬영을 통해 전국단위의 관광지로 발돋움하려는 때 발목을 잡는 것을 우려했다.

▶ 핵폐기장 백지화를 요구하는 부안 주민들이 지난 24일 서울 광화문 정부청사 앞에서 상경시위를 벌였다. 이날 시위에는 핵폐기장 유치를 추진하고 있는 고창, 영광 등 6개 지역 주민들도 참여해 ‘폐기물 처리장 추진 중단',‘원전 건설 중단' 등을 촉구했다. [사진제공= 핵폐기장 백지화 범부안군민 대책위]

실제로 지난 2월 주민 5만2108명 가운데 72%가 참가한 자체 주민투표에서 투표자의 91%가 반대표를 던졌다. 지난달 22일부터는 매주 목요일 저녁에 핵폐기장을 반대하는 촛불집회가 다시 열리고 있다. 정치권에서도 반대운동에 힘을 보태고 있다. 민주노동당은 지난 17일 부안을 방문해 정부의 핵발전 정책 전면재검토를 주장하며 핵폐기장 백지화와 정부의 사과, 책임자처벌 요구했다.

의외인 것은 지난 총선에서 백지화 당론을 정한 민주당 공천으로 5선에 도전했던 정균환 의원이 열린우리당 김춘진 당선자에게 패한 것이다. 핵폐기장과 관련해 여론이 바뀐 증거 아니냐는 질문에 범군민 대책위 관계자는 "탄핵 이슈가 핵폐기장 문제보다 워낙 강했기 때문에 나타난 결과일 뿐"이라며 "김 당선자도 당론은 아니었지만 개인적으로 2월의 주민투표 결과를 존중해 백지화해야 한다고 밝혔다"고 말했다. 김 당선자는 최근 인터뷰에서 "아무리 좋은 것이라고 판단되더라도 지역 주민들이 원하지 않으면 해서는 안 된다"며 "다시 주민투표를 강행할 경우 지난 해보다 더 심한 마찰이 일어날 수 있어 강현욱 전북도지사와 김종규 부안군수가 핵폐기장 유치를 철회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말했다.

#2. 위도선 "우리가 하겠다는데…"

이에 반해 부안군은 아직도 유치 가능성을 포기하지 않고 있다. 부안군청 이현주 비서실장은 "위도의 원전센터와 새만금 간척지에 양자가속기를 유치해 첨단 IT단지를 육성하는 것이 장기적으로 부안군의 자립을 이루는 길이라는 믿음에는 변함이 없다"며 "(유치 신청 때)민주적인 절차를 거치지 못해 주민들의 반대가 많았던 것은 사실이지만 평온한 분위기에서 장단점을 차분히 설득한다면 공식 주민투표에서 좋은 결과를 기대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정부에서 마련한 주민투표법이 7월30일 발효되면 9월중으로 주민투표를 실시할 방침이다.

주민들의 분위기는 배를 타고 위도로 건너가면 180도 달라진다. 위도면 사무소에 근무하는 신재균씨는 "새만금 사업 이후 주력산업인 어업의 조황이 갈수록 나빠지고 있어 위도 경제를 살리려면 원전센터 유치외에는 방법이 없다"며 "위도 주민의 95%는 찬성"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핵폐기장 유치에 찬성하는 위도발전협의회는 최근 주민등록 인구의 82%(상주인구의 90%)인 1천257명의 서명을 받아 '위도 주민만의 투표로 원전센터를 유치할 수 있게 해달라'는 청원을 청와대 등에 제출했다. 협의회 정영복 위원장은 "위도를 살리고 부안과 전북도를 발전시키는 일이 이렇게 어려울줄 몰랐다"며 "이제는 뒤로 물러설 수도 없는 상태로 원전센터 유치만이 살길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고 말했다.

주민들은 극도로 말을 아끼는 분위기다. 한 주민은 "반대만 하는 뭍(부안) 사람들에게 서운하고 섭섭하다"며 "원전 때문에 관광이나 고기 판매가 안된다면 영광 굴비는 누가 사먹겠나"고 말했다. 그러나 위도 주민들이 찬성 일색인 것은 아닌듯 했다. 파장금항에서 만난 한 주민은 "정부에서 '직접 보상을 하지 않겠다'고 발표한 것을 믿지 않는다"며 "보상이 기대에 미치지 못하면 찬성률은 50~60%정도에 그칠 것"이라고 말했다.

▶ 핵폐기장 백지화를 요구하는 부안 주민들이 지난 24일 서울 광화문 정부청사 앞에서 상경시위를 벌였다. 이날 시위에는 핵폐기장 유치를 추진하고 있는 고창, 영광 등 6개 지역 주민들도 참여해 ‘폐기물 처리장 추진 중단',‘원전 건설 중단' 등을 촉구했다. [사진제공= 핵폐기장 백지화 범부안군민 대책위]

#3. 지자체 서너곳 "유치 나설 터"

여기에 다른 변수도 생겼다. 이달말까지 진행되는 핵처리장 유치신청에 전북 고창군, 전남 영광군 등이 나서고 있기 때문이다. 강원도 삼척.경북 울진도 신청을 준비하고 있으며 부안 옆의 군산지역도 유치 움직임이 있다. 이들 지역은 주민 3분의 1 이상 서명을 받으면 유치청원서를 낼 수 있다. 유치청원 후 지방자치단체장이 지방의회 등 지역 의견 수렴을 거쳐 9월15일까지 예비신청을 하게 된다. 예비신청 지역은 현재 예비신청이 완료된 것으로 간주한 전북 부안군과 함께 오는 9월 15일 이후 주민투표를 실시한다. 주민투표는 투표권자의 3분의 1 이상이 참석하면 효력을 발휘하게 되며, 과반수 찬성을 얻게 되면 신청이 확정된다.

전라북도 부안은 군 단위로는 특이하게도 현안이 된 대규모 국책사업만 두가지다. 물막이 공사 후 부지 활용방안을 놓고 논란을 빚고 있는 새만금 간척사업과 지난해 하반기부터 관심의 촛점이 됐던 핵폐기물 처리장 부지선정 문제다. 특히 핵폐기물 처리장은 유치신청을 낸 김종규 군수에 대한 부안 주민의 반발과 유치에 찬성하는 위도주민과의 마찰 등이 얽혀 어떤 결론이 나더라도 후유증이 오래 갈 전망이다.현재로서는 부안이 주민들의 반발로 대형 국책사업이 무산된 첫 사례로 기록될 듯 하다.

핵폐기물 처리장 문제는 김 군수가 지난해 7월14일 전격적으로 유치신청을 내면서 시작됐다. 범부안군민 대책위, 반핵국민행동 등은 즉간 반대운동에 나섰다. 7월24일 산업자원부가 위도를 처리장 부지로 확정하자 반발은 더욱 심해져 41일간의 등교거부를 포함한 촛불시위가 11월말까지 이어졌다. 이 과정에서 9월8일 김 군수 폭행사건을 비롯해 고속도로 점거, 어선의 해상 시위 등 격렬한 시위가 잇따랐다. 결국 정부에서 지난해 12월10일 전면재검토를 발표하고서야 평온을 되찾을 수 있었다.

그런데 취재 과정에서 재미있는 결과를 얻었다. 반대측에서는 '핵폐기장'이라는 용어를 쓰는데 비해 찬성측에서는 예외없이 '원전센터'라는 말을 선호한다는 것이다. 말이 본질을 규정하는 사례일까. 문제는 부안 외에 유치를 신청하는 지자체마다 앞으로 격렬한 내부 갈등이 일어날 가능성이 높다는 점이다. 홍보 미비, 지역 이기주의, 환경단체의 개입탓에 핵폐기장 사업이 난항을 겪고 있다는 정부의 인식과 개발을 미끼로 낙후된 지역에 위험시설을 지으려 한다는 주민들의 반발 사이에는 '핵폐기장'과 '원전센터' 만큼이나 넓은 간극이 존재한다. 모두 만족할 만한 타협안은 없는 것일까. 부안을 떠나면서 서울대나 청와대 아래에 핵폐기물 처리장을 건설하는 것이 가장 속편한 대안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스쳤다. 정부 발표대로 정말 안전하다면 최소한 소규모 시범 처리장이라도 서울에 만드는 것이 국민을 설득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부안=김창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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