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소년 97% “국왕에 대한 충성심이 총리의 필수요건”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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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호 06면

정치 위기가 발생할 때마다 입헌군주 푸미폰 아둔야뎃 국왕의 역할이 주목받는다. 입헌군주는 정치에 초연해야 하지만 그렇지 못한 현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그 이유는 왕권의 정당성과 정치체제의 취약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기 때문으로 볼 수 있다.

태국 왕권의 뿌리는 ‘정의로운 왕, 탐마라차’

불교 국가인 태국에선 ‘이상적인 통치자’가 갖춰야 할 자질로 불교의 가르침인 법(法·탐마)의 실천 능력을 가장 중요시했다. 불교에서는 법에 따라 정의롭게 통치하는 왕을 ‘탐마라차(정의로운 왕)’라고 불렀으며 통치의 정당성을 부여했다. 그는 열 가지의 통치덕목을 실행해야 한다. 보시, 지계(持戒), 희생, 공정, 온화, 노력, 불노(不怒), 불해(不害), 인내, 불역(不逆)이 바로 그것이다.

1932년 절대군주제 붕괴 이후 태국의 입헌군주는 군림하나 지배하지 않는 초정치적 위상을 갖게 됐다. 그러나 18차례의 쿠데타로 인해 정치체제의 이성적·법적 정당성이 약화되자 그 공백을 메울 방안을 왕권에서 찾으려는 시도가 생겨났다. 최초의 시도는 57년 군사 쿠데타를 일으킨 싸릿 정권 때부터 시작됐다. 이후 푸미폰 국왕은 취약한 정치체제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역할을 해왔다. 그는 50년 대관식 때 “모든 국민의 복지를 위하여 법에 따라 통치할 것”임을 선언했다. 이어 선대의 모든 탐마라차가 행한 바대로 단기 출가를 통해 탁발의식과 엄격한 계율의 수도생활을 하고, 수많은 불교행사를 주재해 국가 통합의 구심점 역할을 해왔다.

푸미폰 국왕의 탐마라차로서의 정당성은 ‘국왕(왕실)개발계획’을 통해 더욱 강화됐다. 이 계획에 따라 전국적으로 3000개 이상의 프로젝트를 추진 중인데 수자원·관개시설 개발, 농업개발, 연구개발, 보건위생, 교육개발 등 사회 전 분야를 망라하고 있다. 이를 통해 그는 국민복지를 향상시켜 왕권의 정당성을 입증하고 정치적 영향력까지 확대할 수 있었다. 국왕에 대한 국민의 존경심은 상상하기 힘들 정도다. 국왕은 국가와 사회에 대한 공로로 86년 12월 5일 60회 탄신일에 푸미폰 대왕으로 추대됐다.

최근 친(親)탁신과 반(反)탁신 세력 간의 극단적 대결로 인한 정치 위기 속에서 ‘국왕 역할론’이 다시 대두하는 것도 결국 국왕이 갖는 탐마라차로서의 정당성 때문이다.

영자지 네이션에 따르면 에이백 폴(여론조사기관)에서 최근 15∼18세의 청소년 1925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응답자 중 97% 이상이 차기 총리의 필수조건으로 ‘국왕에 대한 충성심’과 ‘책임감·도덕성’을 꼽았다. 국왕에 대한 신뢰와 기대가 어느 정도인지 말해 주는 사례다. 그러나 입헌군주의 정치적 역할은 비정상적일 수 있다.

장기적으로는 정치발전에 부담이 될 가능성도 크다. 하지만 정당성이 취약한 정치체제가 지속되는 한, 탐마라차로서의 정당성을 인정받는 푸미폰 국왕의 정치적 역할은
지속될 수밖에 없는 현실이다.



김홍구 교수는
1990년 한국외대에서 정치학박사(국제관계학)를 받았다. 부산외대에서 25년간 태국어를 가르쳤으며 한국동남아학회 회장을 역임했다. 현재 한국태국학회 회장과 한국동남아연구소 소장으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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