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이덕일의 事思史: 조선 왕을 말하다] 인재들을 죽음으로 내몬 리더의 지적 능력 부족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91호 32면

무오년, 서옥에서 바라보다(73Χ50cm): 역사를 기록하는 사관들은 항상 권력과 긴장 관계에 있었다. 훈구파와 사림 간의 긴장은 연산군 시절 무오사화를 계기로 폭발했다. 필화(筆禍)사건이 터지면 대(代)를 이은 숙청과 보복의 역사를 낳아 수많은 선비를 죽음으로 내몰았다. 우승우(한국화가)

연산군 이륭(李륭)처럼 축복 속에 태어난 경우도 찾기 어렵다. 성종 7년(1476) 11월 그가 태어나자 도승지 현석규(玄碩圭) 등은 “개국 이후 문종과 예종은 모두 잠저(潛邸)에서 탄생하시어서 오늘 같은 경사는 있지 않았습니다”고 축하했다. 단종을 제외하고 이륭만이 궐내에서 탄생한 것이다. 종친·대신이 모두 입궐해 축하하자 성종은 대사령을 내려 백성과 기쁨을 함께했다. 성종은 재위 9년(1478) 7월 이조판서 강희맹(姜希孟)에게 말 1필을 내려줬는데『성종실록』이 “강희맹의 집에서 자라던 원자가 항상 준마(駿馬) 보기를 좋아하므로 내려준 것이다”고 쓴 것처럼 원자를 위한 것이었다.

왕위에서 쫓겨난 임금들 연산군② 준비 안 된 군왕

강희맹은 세종의 장인 심온(沈溫)의 외손자로서 세종의 조카였다. 세 살 때부터 말을 좋아했던 연산군을 성종은 ‘학자(學者) 군주’로 키우고 싶었다. 연산군이 열 살 때인 성종 16년(1485) 12월 형조판서 성준(成俊)이 “세자가 지금 『소학(小學)』『대학(大學)』『중용(中庸)』『논어(論語)』 등의 책을 읽었으니 서연(書筵)에 청하여 앞으로는 뜻까지 해석하게 하소서”라고 청했다. 서연은 세자가 사부나 빈객 같은 스승들에게 학문을 배우는 자리이다. 열 살 때 경서들을 읽을 줄은 알았으나 뜻은 해득하지 못했다. 1년 후인 이듬해 11월 서연관(書筵官)이 성종에게 “세자가 『논어』를 다 읽었습니다”고 보고하자 “이제부터『맹자(孟子)』를 읽히도록 하라”고 명한다. 1년 전에도 읽었다는『논어』를 이제야 다 읽었다는 보고는 세자의 학습이 지지부진함을 말해 준다. 과연 성종은 재위 23년(1492) 1월 승정원에 직접 전교를 내려 “세자가 지금 17세지만 문리(文理)를 해득하지 못해 내가 심히 근심하고 있다”고 토로했다.

최고의 학자들에게 조강·주강·석강으로 하루 세 번씩 집중 교육을 받았음에도 연산군은 17세까지 문리를 터득하지 못했다. 그래서 성종은 세자의 학습 순서를 바꾸었다. 원래 사서(四書) 등을 통해 유학적 세계관을 형성한 다음 구체적 사례가 담겨 있는『사기(史記)』 같은 역사서로 넘어가는 것이 세자의 학습 순서지만 역사서를 먼저 보는 것으로 바꾼 것이다.

동부승지 조위(曺偉)가 성종 23년 “『사기』를 읽으면 문리가 쉽게 통합니다”며 역사서를 먼저 읽게 하자고 제안했고, 성종도 “그렇다. 영의정이 일찍이 ‘『춘추(春秋)』를 읽히는 것이 옳다’고 하였고, 나도 또한『춘추』는 선악을 포폄(褒貶:옳고 그름을 판단함)한 책이며 치란과 득실이 담겨져 있으니 역사라고 생각한다(『성종실록』 23년 1월 29일)”고 동의했다.

그러나 이후에도 연산군의 학문이 진취했다는 기록은 없고 “왕(연산군)이 오랫동안 스승 곁에 있었고 나이 또한 장성했는데도 문리를 통하지 못했다”는 『연산군일기』의 기록처럼 학습은 지지부진했다. 연산군은 시(詩)를 좋아한 반면 경전(經典)을 싫어했는데, 이는 유교국가 조선의 국왕으로는 큰 결점이었다. 호문(好文)이자 호색(好色)의 군주였던 성종이 서른여덟으로 세상을 떠나면서 연산군은 1494년 19세의 젊은 나이로 즉위했으나 왜 유교 이념으로 나라를 다스려야 하는지를 이해하지 못한 상태였다.

즉위 직후 연산군은 수륙재(水陸齋)를 놓고 유신(儒臣)들과 처음 충돌한다. 성종의 영혼을 위한 불교의 천도제였으나 대간에서 “대행 대왕이 불도를 본디 믿지 않으셨는데, 이제 칠칠일에 수륙재를 지낸다면 효자가 어버이를 받드는 뜻이 아니니 지내지 마소서”라고 반대했다. 연산군은 반대를 무릅쓰고 지내려다 홍문관과 승정원까지 반대하자 후퇴했다가 다시 강행하겠다고 말을 바꾸었다. 한마디로 국왕이 될 준비가 돼 있지 않았다.

게다가 왕이 된 이후 학문을 더욱 등한시했다. 연산군 6년(1500) 10월 사헌부에서 “왕위에 오르신 이후로는 경연(經筵)에 나오시는 날이 얼마 되지 않아 6년 동안『통감강목(通鑑綱目)』 1부(部)도 아직 다 진강(進講)하지 못했습니다”고 상소한 것이 이를 말해 준다. 경서(經書)는 물론 역사서도 읽지 않다 보니 국왕 자리가 지닌 고도의 정치성을 이해하지 못했다.

이런 연산군의 무지를 파고든 사건이 재위 4년(1498)의 무오사화(戊午士禍)였다. 연산군 4년 7월 1일 윤필상·노사신(盧思愼)·한치형(韓致亨)·유자광(柳子光) 등의 대신들이 국왕이 거처하는 편전(便殿)의 정문인 차비문(差備門)으로 와 ‘비사(秘事)’를 아뢰겠다고 청하자 연산군의 처남이자 도승지였던 신수근(愼守勤)이 안내했다. 예문관 사초 담당자인 검열(檢閱) 이사공(李思恭)이 참석하려 하자 신수근이 “참여해 들을 필요가 없다”고 막았다. 당시 조정은 비사를 아뢰겠다고 요청한 훈구 세력과 이들의 전횡을 비판하는 사림 세력으로 나뉘어 있었다. 훈구 세력의 약화가 자신에게 부과된 시대적 소명이었으나 사림의 간쟁(諫爭)을 귀찮아했던 연산군은 오히려 훈구 쪽으로 경도돼 있었다.

“의금부 경력(經歷) 홍사호(洪士灝)와 의금부 도사(都事) 신극성(愼克成)이 명령을 받고 경상도로 달려갔으나 외인(外人)들은 무슨 일인지 알지를 못했다”는 『연산군일기』의 기록처럼 군사작전 하듯 비밀리에 명령을 내렸다. 홍사호 등이 달려간 곳은 사관 김일손(金馹孫)이 풍질(風疾)을 치료하고 있던 경상도 청도군(淸道郡)이었다. 의금부 도사가 나타나자 김일손은 “지금 내가 잡혀가는 것이 과연 사초(史草)에서 일어났다면 반드시 큰 옥(獄)이 일어날 것이오”라고 예견했다. 처음 문제가 된 사초는 ‘세조가 의경세자(덕종)의 후궁인 귀인 권씨(權氏) 등을 불렀으나 가지 않았다’는 것으로서 세조가 며느리들을 탐했다고 의심할 만한 내용들이었다. 김일손은 국문에서 “청컨대 혼자 죽겠습니다”고 말해 단독 소행으로 끝내려 했다.

그러나 이는 유자광 등이 ‘비사’를 알릴 때의 계획과 어긋나는 것이었다. 조선 중기 허봉(허봉)은 ‘유자광전(柳子光傳)’에서 ‘유자광은 옥사가 제 뜻대로 되지 않을까 염려해 밤낮으로 단련하는 방법을 모색했다’면서 소매 속에서 김종직의 문집을 꺼내 ‘조의제문(弔義帝文)’과 ‘술주시(述酒詩)’를 추관(秋官)들에게 두루 보이면서 “이것은 모두 세조를 지칭해 지은 것인데 김일손의 악한 것은 모두 김종직이 가르친 것이다”고 말했다고 전한다. ‘조의제문’은 김종직이 정축년(丁丑年:세조 3년) 10월 답계역(踏溪驛)에서 잘 때 꿈에 초(楚)나라 의제(義帝)가 나타나 “서초패왕(西楚覇王:항우)에게 살해되어 빈강(彬江:중국 남방의 강)에 잠겼다”고 하소연하므로 꿈에서 깨어나 의제에게 조문했다는 내용의 글이다. 정축년 10월은 단종이 살해당한 달이므로 의제는 단종을 뜻하는 것이다. ‘술주시’는 중국 남북조 때 송(宋)의 유유(劉裕:362~422)가 동진(東晉) 공제(恭帝)의 왕위를 빼앗고 죽인 것을 애도한 시로서 이 역시 세조가 단종을 찬시(簒弑)했음을 비난하는 것이었다.

‘유자광전’은 “유자광이 주석하면서 글귀를 해석해 왕이 알기 쉽게 했다”고 적고 있고,『연산군일기』도 “유자광이 김종직의 ‘조의제문’을 구절마다 풀이해 아뢰었다”고 말하는 것처럼 연산군은 유자광의 시각으로 이 사건을 바라보았다. 연산군은 김일손·권오복(權五福)·권경유(權景裕) 세 사관(史官)을 대역죄로 능지처사했는데, 유자광 등의 훈구 세력이 자신을 이용해 정적인 사림 세력을 제거한 것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그는 사림이 왕권 강화와 훈구 세력의 약화에 도움이 되는 세력이라는 객관적 사실을 파악하지 못했다. 이성이 아니라 감정으로 정국을 바라본 그 자체가 그의 지적 능력의 한계를 말해 주는 것이었다. 무오사화 이후 왕권은 크게 강해졌지만 훈구라는 바다에 떠 있는 왕권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한 채 강화된 왕권만을 바라보았다. <다음 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