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죄판결 이정렬 판사 "판결 파장 커 당혹…소신엔 변함없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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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심적 병역거부권은 헌법 교과서와 고시 잡지에도 나오는 학계의 주류 이론이다."

'양심적' 병역거부권을 인정하고 불법 시위를 한 전국공무원노조(전공노) 간부들에게 선고유예 판결을 내려 화제가 된 서울 남부지법 이정렬(李政烈.35) 판사가 24일 판결의 배경과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李판사는 단독판사가 대법원의 판례와 배치되는 판결을 내린 사실을 부담스러워 했다. 그러나 "'양심적 병역거부는 헌법이 정한 양심의 자유 범위에 들지 않는다'는 대법원 판례를 살펴보았으나 납득할 만한 근거를 찾기 어려웠다"고 강조했다. 헌법재판소의 위헌제청 결정이 내려질 때까지 선고를 연기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지적에 대해 "(판사의) 판단이 명백하다면 선고를 미룰 이유가 없다"며 "소신에는 변함이 없다"고 강조했다.

▶ 재향군인회 소속회원 500여명이 24일 서울 남부지법 앞에서 양심적 병역거부에 대한 무죄판결을 규탄하는 집회를 열었다. 집회 참가자들이 무릎을 꿇고 병역거부에 대한 엄중처벌을 촉구하고 있다. [김춘식 기자]

국방의 의무를 앞세워야 한다는 주장에 대해서 그는 "개인보다 국가를 먼저 생각하는 사람들의 생각일 뿐"이라며 맞섰다. 국가는 개인의 권리와 자유를 보장하기 위한 장치인데 국가가 양심의 자유를 억누를 근거가 전혀 없다는 것이다.

전공노 판결과 관련, 李판사는 "개인적으로 공무원에게 단체행동권을 주는 것을 반대하지만 정부가 공무원 노조 설립을 허가하면서 핵심적인 권리를 배제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고 주장했다. 두 사건 판결의 파장이 의외로 커 당혹스럽지만 언젠가 이야기해야 할 문제를 공론(公論)의 장(場)으로 끌어낸 것이 성과라고 자평했다. 연이은 '진보적 판결'이 언론을 의식한 것 아니냐는 지적에 "정치 입문은 생각해본 적이 없다"며 손사래를 쳤다.

그는 "판사들은 열심히 일하는데 알릴 방법도 없다. 앞으로 판사들도 자신의 판결이 언론에 보도되는 것을 피할 이유가 없다"고 말했다.

이날 인터뷰는 남부지법 근처의 한 음식점과 李판사의 집에서 두 시간에 걸쳐 진행됐다. "판결 이후 인터뷰 요청이 쇄도했으나 고사해오다 판결 배경을 설명할 필요가 있어 응하게 됐다"고 했다.

임장혁 기자
사진=김춘식 기자<cyjdj@joongang.co.kr>

'튀는 판결' 잦은 30대 판사
"균형 잃고 너무 앞서" 일부 동료들은 비판

이정렬 판사는 기존의 틀을 뒤집는 의외의 판결을 자주 내린다는 평가를 법원 안팎에서 들어왔다.

서울고법의 한 판사는 "법관은 사회여건 등을 두루 고려해 균형 잡힌 판단을 내리는 것이 중요하다"면서 "대안도 없는 상황에서 너무 앞서나간 판결이었던 것 같다"고 평했다.

李판사는 지난 21일 귀금속 등 1억5000만원의 금품을 훔친 혐의로 구속기소돼 징역 3년~2년6월이 구형된 콜롬비아인 절도범 8명에게 이례적으로 징역 1년6월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했다. 李판사는 "대한민국이 따뜻하고 인정 넘치는 마음씨를 가진 사람들이 사는 나라라는 것을 잊지 말라"며 이유를 밝혔다.

李판사처럼 단독판사는 지방법원 배석판사를 거친 경력 5~10년차의 판사들이 주로 맡는다. 한명의 부장판사(재판장)와 두명의 배석판사로 구성되는 합의부는 이들 세명의 판사가 합의해 결론을 내린다. 그러나 단독판사는 혼자 재판을 진행하고 선고까지 내린다.

김현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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