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잠 깨어난 일본] 2. '장인 정신에 IT' 제조업 재무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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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 나고야 도요타시에 있는 도요타 자동차 공장. 일본 기업 중 최초로 순이익 1조엔 시대를 열었다.

"나쁜 정보를 빨리 올려라(Bad news first)!"

도요타 자동차에선 말단 기능공도 작업 라인을 정지시킬 권리가 있다. 공정에 작은 문제라도 생기면 스톱 버튼을 누른다. 적당주의는 통하지 않는다. 문제가 있는데도 알리지 않고 넘어가는 게 문제라는 인식이다. 오쿠다 회장은 "다음 공정은 손님이라고 생각하라"고 강조한다.

도요타의 생산성은 종업원 스스로 높인다. 매일 '가이젠(改善)'을 외친다. 종업원들이 기계 사용과 작업 방법, 레이아웃 변경 등에 대한 아이디어를 내면 과장급 회의에서 심사해 500엔에서 20만엔까지 포상금을 준다. 지금까지 최고 제안은 포상금 17만엔짜리. 지난해 53만건의 제안이 나왔고 99%가 채택됐다.

이것이 바로 일본 기업 최초로 순익 1조엔 시대를 연 도요타의 강점이다. 생산 현장에서 근로자들이 끊임없이 공정을 개선하고 현장 기술자들이 아이디어를 낸다.

2003 회계연도(지난해 4월~올 3월)의 순익은 1조1600억엔. 1년 전보다 55% 불어났다. 많은 기업이 찾아와 생산방식을 벤치마킹하지만 겉만 보고 가기 때문에 도요타를 따라잡지 못한다.

10년 잠에서 깨어난 일본 경제 '새 살'의 중추는 변함없이 강한 제조업이다. 일본만의 기술로 일본만이 만들 수 있는 물건으로 세계시장을 공략한다.

일본 최대 건설장비 업체인 고마쓰제작소 오사카 공장. 공장을 둘러보면 그 규모와 자동화 생산설비, 그리고 정돈에 세번 놀란다. 7개 나라에 공장이 있는데 굴착기의 회전 부분(Swing Machinery) 등 핵심 부품은 일본에서 만들어 공급한다.

대우종합기계 굴착기가 중국 시장에선 고마쓰를 앞섰지만, 세계 시장에서나 공간을 적게 차지하는 소회전 반경 미니 굴착기와 초대형 등 비싼 제품은 여전히 밀린다. 고마쓰는 내구성을 기반으로 한 브랜드 파워에 정보기술(IT)을 접목해 제품을 개발한다. 2001년 도난 방지를 위해 수압 굴착기에 위성위치확인시스템(GPS)을 달았다.

임대회사들을 위해 보유 굴착기의 남은 연료를 계측하는 장비도 개발했다. 고마쓰의 2003 회계연도 순익은 중국 특수 등에 힘입어 전년도의 9배인 269억엔을 기록했다.

"모노즈쿠리(物作り.물건 만들기) 정신과 IT를 융합해 새 모델을 만들기 위해 노력한다. 종업원들과 하나가 되면 업계의 승자가 될 수 있다."(사카네 마사히로 고마쓰 사장)

교토의 무라타제작소도 기술력에서 뒤지지 않는다. TV와 라디오에 들어가는 세라믹 필터와 세라믹 히터, 잡음 방지 필터 등을 세계 최초로 상품화했다. 같은 업계의 두배인 연간 매출의 8%를 연구.개발(R&D)비로 투자한다.

지난해 345억엔을 투입했다. 4년 전부터 나노기술을 접목한 세라믹 제품 개발에 힘을 쏟고 있다. 마부치 야스키 기술관리부장은 "독자적인 제품을 만들어 공급한다는 것이 사시(社是)"라며 "기술개발 인력이 몇명인지는 1급 비밀"이라고 손을 저었다.

1944년 회사를 창업한 무라타 아키라 명예회장은 토기를 만드는 아버지를 돕다가 '교토와 간사이, 일본, 나아가 세계에 없는 물건을 만들어야 한다'고 깨우쳐 무라타의 사시를 만들었다.

2004년 일본의 봄은 전기.전자 메이커의 회생과 함께 왔다. 히타치.마쓰시타 등 10대 전기.전자 메이커가 2003 회계연도에서 일제히 흑자를 기록한 것. 10대 메이커의 전체 흑자는 3993억엔. 이들은 2001년 IT 거품이 꺼졌을 때 1조9000억엔의 적자를 냈다.

10대 메이커 중 마쓰시타전기의 도약이 돋보인다. 구조조정과 주력산업에 집중하는 사업 재편이 성공했다. 2002년 3월 결산 때 5000억엔이 넘는 적자를 냈다가 이번에 421억엔 흑자로 돌아섰다.

디지털 가전 부활의 원동력이 된 DVD 리코더 시장은 마쓰시타의 DIGA가 휩쓴다. 역시 2003년 1등 상품으로 선정된 드럼 세탁기는 세계 최초로 뚜껑 부분이 30도 각도로 경사지도록 디자인했다. 도다 부사장이 "경쟁사와 다를 게 없는 디자인과 기능을 추구하는 2등 전략을 버리라"고 독려한 결과다.

일본의 기술력은 기발한 제품으로 꽃피운다. 가전업체들은 물에 강한 방수 디지털 제품도 만든다. 세이코인스트루먼츠와 NTT도코모가 함께 개발한 리스트모는 팔목에 차고 다니는 휴대전화. 손을 씻을 때나 비가 와도 끄떡없다. 3만7000엔이란 가격에도 지난해 5월부터 연말까지 5000대를 팔았다.

90년대 '잃어버린 10년'에도 일본 기업들은 꾸준히 R&D 투자를 했다. 국내총생산(GDP) 500조엔의 일본 경제가 한 해에 16조엔(GDP의 3.1%)을 기술개발에 투자해 왔다. 거기서 나온 신기술이 일본을 다시 일으키는 것이다.

세계 경제가 회복되는 가운데 기업들이 설비투자를 하려면 기계가 필요하다. 설비투자를 위한 기계는 일본이 최고. 82년 세계 기계설비 시장에서 12%였던 일본의 비중이 2002년에 24%로 커졌다. 특히 지난해 이라크 전쟁을 계기로 일본 기계류의 수출이 급증했다. 이것이 '주가 상승→수출 확대→설비투자 증가→경기회복'으로 나타난 것이다.

"일본은 신기술이 아니면 경제가 성장할 수 없다는 실험을 계속하는 나라다. 지금의 경제 회복세는 앞으로 10년은 이어질 것이다. 그 10년을 이끌 기술이 일본에 있기 때문이다."(가라즈 하지메 도카이대 명예교수)

도요타는 R&D비로 2002년 7000억엔, 지난해 9000억엔을 쏟아부었다. 한국은 연간 12조~13조원을 R&D에 투자하는데 그 중 1할은 삼성전자가 한다. 이 결과는 미국 특허청 등록 기업으로 나타난다. 10위권 중 6개(캐논.NEC.히타치.마쓰시타.소니.미쓰비시)가 일본 기업이고, 미국 기업이 3개(IBM.마이크론.GE), 그리고 삼성전자가 10위다.

기름값이 오르면서 연료비가 덜 드는 가솔린 엔진과 전기모터를 함께 장착한 하이브리드 자동차에 대한 관심이 높다. 현대자동차는 오는 10월에나 첫선을 보일 예정인데, 도요타는 이미 1997년에 프리우스를 선보였다. 2000년 미국 시장에 진출했는데 지난해 4만3435대를 팔았고, 요즘 판매가 급증하고 있다.

도쿄.오사카.나고야.교토=특별취재팀
김정수 경제연구소장, 양재찬.신혜경 전문기자, 이종태.김광기 기자, 김현기 도쿄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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