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올림픽 30年·태권도 40年] 66. 부산 동아시아대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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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폐회식에서 이소무라 오사카 시장(左)이 대회기를 흔들고 있다. 오른쪽은 조직위원장인 필자와 문정수 전 부산시장.

제1회 동아시아 경기대회는 1993년 중국 상하이에서 열렸다. 참가대상은 한국·중국·일본·북한 등 극동 4대 스포츠 강국에 대만·홍콩·몽골·마카오·괌 등 총 9개국이었다. 아시안게임의 축소판 성격인 이 대회는 34년에 폐지된 극동선수권의 부활이라고 할 수 있었다. 냉전체제가 붕괴되면서 국가간 화해무드가 무르익는 시점에 창설된 이 대회는 올림픽의 기본 이념에 충실케 됐다는 배경을 갖고 있다. 특히 여전히 이념 갈등을 빚고있는 남북한과 중국-대만이 만난다는 정치적 의미도 있었다.

94년 히로시마 아시안게임 도중 97년 제2회 동아시아 대회는 부산에서 치르기로 결정했다. 2002년 아시안게임 개최지인 부산은 동아시아 게임을 예행연습으로 삼을 계획이었다. 그러나 시설도 제대로 갖추지 못해서 옛날 경기장을 그대로 썼고 운영요원도 경험이 부족했다. 한국에서 국제대회를 많이 치르다보니 조직위에 KOC 직원을 많이 파견해서 경험을 쌓게 하고 국제기구 임원도 많이 배출했다. 99년 평창 겨울아시안게임과 2002년 부산 아시안게임을 대비해 이승원 스키협회장과 박상하 KOC 부위원장을 아시아올림픽평의회(OCA) 부회장으로 밀었다.

1회 대회와 똑같이 9개국에서 2100명의 선수단이 참가한 가운데 97년 5월10일부터 19일까지 대회가 열렸다. 개회식에는 김영삼 대통령이 참석했고, 김대중 국민회의 대표도 자리를 함께 했다.

92년에 중국과 수교를 시작한 한국은 중국과 매우 좋은 협력관계를 유지해 왔다. 그런데 2002년 아시안게임 유치전에서 가오슝이 부산에 패배한 이후여서 대만과는 좀 껄끄러운 상태였다. 하지만 대회장인 나는 손님접대를 잘 해야 했다. 대만 교육부 장관에게 VIP카드인 G카드를 주고 차량도 지원했다.

새벽 2시에 중국올림픽위원회 대표단이 항의 공한을 보내왔다. 정치인에게 ID카드를 줘선 안된다는 것이었다. 대만을 의식한 행동이었다. 고심을 한 끝에 G카드 대신 일반 카드를 주되 귀빈석과 호텔, 차량 등 VIP에 준하는 대우를 하기로 했다. 중국측은 일반카드라도 ID카드는 안된다는 강경한 입장이었지만 우리 입장을 잘 설명하자 “당신 얼굴을 봐서 그 정도는 양해해주겠다”고 했다.

그런데 대만으로서는 이것도 불쾌했다. 선수단 입장 때 본부석 앞에서 30초간 정지해 있으면서 무언의 항의를 했다. 스포츠는 정치와 무관하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정치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

한국선수단 단장은 최헌열(농구), 부단장은 엄운규(태권도), 이상균(레슬링), 신민자(수영)였다. 신민자 부단장은 종합국제대회 첫 여성 부단장의 영광을 안았다. 종합 2위를 노렸던 한국 선수단은 금 45, 은 39, 동 51개로 종합 3위에 그쳤다.

폐회식 때는 대회장인 나와 문정수 부산시장이 차기 개최지인 일본 오사카의 이소무라 시장과 후루하시 JOC 위원장에 대회기를 넘겨줬다.

김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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