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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ek&CoverStory] 4대문파 주장을 만나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전필호 기자


집값 100만원 때 하루 400만원 팔았어

 소공동에서 이전해 삼풍상가 4층에 새롭게 오픈한 아서원은 대박이 났다. 초A급 요리사의 월급이 6만원이던 시절 하루 매상을 400만원까지 기록했다. 그때 집값이 100만원 정도였으니 요즘 같아선 상상도 못할 매출이다. 장사가 한창 잘될 땐 요리사만 40명이 넘었다. 주방과 홀 직원을 다 합치면 100명은 족히 됐다. 규모만 큰 게 아니었다. 장비도 최신식이었다. 주방에 새롭게 설비한 LPG 화덕은 장안 최초의 가스 화덕이었다. 그 당시 사용했던 깨탄 화덕 준비작업은 요리사들이 가장 끔찍하게 여겼던 일이다. 하루에도 몇 시간씩 매달리던 중노동이 버튼 하나로 사라졌으니 주변 식당의 요리사들의 입에서 하나같이 “나도 아서원에서 일하고 싶다”는 말이 나올 만했다.

손님이 워낙 많다 보니 웨이터들은 한꺼번에 많은 요리를 서빙하는 경쟁을 벌이곤 했다. 쟁반에 요리를 가득 채우고 그 위에 또 쟁반을 올려 5~6층은 거뜬히 쌓곤 했는데 높이가 높을수록 웨이터의 기술을 높이 쳐줬다. 연회가 시작할 무렵 웨이터들이 줄을 서서 쟁반을 산처럼 쌓아 서빙하는 모습은 요즘엔 볼 수 없는 진풍경이었다. 그땐 웨이터도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요리사가 주방에서 수년간 잡일을 마친 뒤에 요리를 할 수 있었듯이 웨이터도 벨보이나 잔심부름꾼 노릇을 몇 년 보낸 다음에야 나비 넥타이를 맬 수 있었다. VIP를 모시는 특실 담당 웨이터는 파워도 대단했다. 단골 VIP 덕에 한몫 단단히 챙겨서 나가는 웨이터도 있었다.


동남아 음식에서 많은 영감 받았지

 고민할 여지도 없었다. 당장 신라호텔에 지원했다. 그때 특급호텔의 월급은 일반 레스토랑보다 낮았다. 그러나 나는 돈보다 호텔의 해외연수와 교육지원에 더 관심이 있었다. 넓은 세상을 구경하고 보다 다양한 음식을 경험하고 싶었다. 신라호텔이 1979년 오쿠라호텔과 제휴하면서 내게도 오쿠라호텔로 연수를 갈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오쿠라호텔 중식당 주방에서 나는 충격을 받았다. 기술은 둘째치고 그들이 지닌 요리사로서의 자부심은 내게 충격이었다. 당시 한국에서 요리사는 홀대받던 직업이었다. 내 주변만 봐도 자신의 직업을 숨기고 사는 요리사가 여럿이었다. 그러나 일본에선 요리사가 사회에서 존경받고 있었고, 일본의 요리사는 각자의 자리에서 최고가 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고 있었다.

연수를 다녀온 다음에도 수시로 동남아시아에 갔다. 하나라도 더 맛보려고 소화제를 먹어가며 요리를 찾아다녔다. 동남아시아는 나에게 보물창고였다. 온 천지가 호기심을 자극했다. 한번 식당에 들어가면 여러 메뉴를 시켜놓고 냄새도 맡아보고 손가락으로 문질러 본 다음에 한입 물었다. 몰래 음식 사진을 찍다 식당에서 쫓겨난 일도 허다하다. 그 경험이 쌓여 다양한 메뉴를 개발할 수 있었다. 특급호텔에 중식당이 들어선 뒤로 한국의 중식 문화엔 많은 발전이 있었다. 지금도 수많은 요리사가 해외에서 새 조리법을 익혀 돌아오고 있다. 요리는 끊임없이 교류하고 개발돼야 발전한다.

국자로 얻어맞으며 배운 요리야

 전날 눈을 감으며 다음 날 새벽에 일어나 화덕에 깨탄 쌓는 일을 하루만 쉴 수 있다면 무슨 짓이라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가스가 없던 시절 강한 불길을 만들기 위해 중식당 주방에선 새벽부터 전쟁을 치러야 했다. 깨탄을 부순 다음 황토와 짓이겨 화덕의 벽에 붙이는 일을 하루도 거르지 않고 두 번씩 해야 했다. 온종일 설거지하다 보면 갈라진 손에서 진물이 흘러나왔다. 잠들기 전 상처에 쇠기름을 바르고 옷감으로 친친 동여맸다. 아침에 일어나면 조금 진정이 되었다. 하급 요리사 시절 주방에서 어물쩍대고 있으면 선배들의 국자가 어김없이 이마로 날아왔다. 그 국자가 얼마나 아팠던지.

지금 생각해 보니 우리 때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요리사는 선대로부터 지긋지긋하게 전해 내려오던 일종의 업(業)이었다. 헐벗고 굶주리던 시절이었고 살기 위해선 요리를 해야 했다. 우리 시대에 중식 요리사라면 누구나 똑같은 아픔을 안고 살아야 했다. 누구는 굴레에서 벗어나고 싶어 했고, 누구는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다. 시대가 흘러 지금 젊은 화교들은 중국 요리를 하지 않는다. ‘화교 = 중식 요리사’라는 공식은 이내 사라질 것이다. 그 시절엔 그렇게 벗어나고 싶었던 요리사의 길이었는데, 이제는 맥이 끊기면 어쩌나 하는 걱정도 든다. 호화대반점 멤버가 삼십 년이 지난 지금도 꾸준히 모임을 갖는 건 어쩌면 화교의 업을 정리하는 마지막 세대라는 걸 본능적으로 알고 있어서일지도 모른다.


두세 시간 일찍 출근해 선배들 기다렸지

 동부이촌동의 홍보석은 당시 젊은 요리사 사이에서 최고의 테크니션이 모인 곳으로 통했다. 홍보석의 사천요리 기술은 장안에서 가장 화려하고 아름다웠다. 젊고 패기있는 요리사라면 누구나 홍보석의 기술을 배우고 싶어 했다. 1976년 한강 홍보석이 대우빌딩으로 이전하면서 나에게도 기회가 왔다. 그때 난 스물세 살이었다. 대관원에서 기초기술을 배우고 있던 나는 왕춘량에게 발탁돼 홍보석 말석에 낄 수 있었다. 대우 홍보석은 정전승 주방장을 중심으로 불판의 이종복, 칼판의 왕춘량이 지휘하고 있었고, 그 밑으로 허인·주은리·강수명·필가부 등 쟁쟁한 실력자가 두루 포진해 있었다. 모두 26명의 요리사가 있었는데 하나같이 다른 식당에 비해 유난히 번뜩이는 눈빛을 지니고 있었다.

기민한 하급 요리사들은 남보다 두세 시간 일찍 출근했다. 그러곤 자기 일을 다 끝내놓고 선배를 기다렸다. 하급 요리사가 하는 일은 재료를 준비하고 만두나 꽃빵 같은 간단한 요리를 하는 단순노동이었다. 조금만 부지런을 떨면 얼마든지 빨리 끝낼 수 있는 일이다. 일을 마치고 있으면 일손이 달리는 선배가 “야, 이거 해”라며 다음 단계의 일거리를 던져주곤 했다. 그렇게 어깨너머로 배워야 남들보다 하나라도 더 배울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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