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경유착 '고리 끊기' 대장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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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야 정치권 모두와 대통령 주변 인사들 및 국내의 대표적 대기업들에 대한 성역없는 수사였다."

안대희 대검 중수부장은 21일 9개월간에 걸친 불법대선자금 수사 결과를 발표하면서 그 의의를 이렇게 정리했다.

이번 수사는 이탈리아에서 진행됐던 '마니폴리테(깨끗한 손)'에 비견되며 한국 정.재계를 뒤흔들었다.

사상 처음으로 정치권과 기업들 간의 불법 정치자금 수수 관행에 사정의 칼날을 댄 자체만으로도 의미가 컸다. 특히 '살아있는 권력'인 노무현 대통령 선거 캠프의 불법 자금에도 예외를 두지 않았다.

검찰은 지난 1월 한나라당 김영일 의원을 구속한 것을 시작으로 현역 국회의원 23명(구속 7명)을 사법처리했다. 또 손길승 SK그룹 회장, 이중근 ㈜부영 회장 등 대기업 최고위층 3명을 구속 기소하고, 대기업 구조본부장 등 20여명을 구속 또는 불구속 기소했다.

◇"성역없는 수사"=검찰은 한나라당이 2002년 대선 직전 국내 굴지의 대기업 등에서 823억원의 불법자금을 모금한 사실을 밝혀냈다. 이회창 전 총재가 검찰 조사를 받고 김영일.최돈웅 의원이 줄줄이 구속된 끝에 한나라당은 '부패당'이란 오명을 뒤집어써야 했다. '차떼기'라는 유행어가 등장하면서 지난 4.15 총선에서 제2당으로 전락하는 데도 영향을 미쳤다.

盧캠프 주변의 불법 자금에 대한 수사도 거침없이 진행됐다. 최도술 전 청와대 총무비서관을 필두로 안희정.여택수씨 등 최측근들이 잇따라 구속되거나 재판에 회부됐다.

정대철.이상수 의원 등 참여정부 인사들도 줄줄이 범법자로 전락했다. 특히 盧대통령을 벼랑 끝으로 내몬 탄핵안 가결의 원인도 따지고 보면 대선자금 수사였다는 분석이 많다.

수사 결과 최종 집계된 한나라당과 盧캠프의 불법 대선자금 규모는 823억원 대 119억원. 이는 盧대통령이 사임 기준으로 제시한 '10분의 1'을 넘는 수치다. 검찰 수사에 족쇄가 됐던 '10분의 1'발언은 자신의 진퇴를 총선 결과와 연계시키겠다는 盧대통령의 추가 발언에 이어 탄핵 정국으로 접어들면서 의미를 상실했다.

검찰의 한 고위 관계자는 "오히려 눈치 안 보고 앞만 보는 수사를 함으로써 검찰 조직은 독립성과 중립성 확보의 기틀을 다질 수 있었다"며 "검찰로서는 '이 수사가 실패하면 바로 서기는커녕 죽는다'는 절박감이 있었던 게 사실"이라고 털어놓았다.

'정경유착의 고리 끊기'와 '돈 안 드는 선거풍토 조성'은 수사의 성과로 꼽힌다. 安부장은 "비자금 조성을 통한 정치자금 제공은 기업 부실의 악순환을 초래한다"면서 "이번 수사가 기업의 투명성을 높이는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불법 정치자금의 조달 과정도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관행이라는 미명 아래 이뤄진 정치자금의 모금 및 사용 실태가 밝혀짐으로써 정치권에서 자정노력이 나타났고 제도적 기틀도 마련됐다.

지난 총선에서 돈 선거 풍조가 확연히 줄어든 데는 대선자금 수사의 영향도 적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민변 김인회 사무차장은 "이번 대선자금 수사가 정경유착의 고리를 끊고 깨끗한 정치풍토를 마련하는 데 기여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고 평가했다.

◇"압박 수사" 논란=검찰은 일부 기업의 경우 정치자금 제공과는 별 연관성이 없는 기업 운영과정의 비리 혐의로 구속영장을 청구하기도 했다.

또 수사 결과가 나오기도 전에 "거대한 게이트로 번질 수 있다"고 말해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하지만 '엄청난' 비리는 현재까지 밝혀내지 못했다. 괘씸죄에 걸린 해당 기업 임원들에 대한 압박 수단이 아니었느냐는 의심을 사는 이유다.

검찰은 수사 초기에 '본류는 기업이 아니라 정치권'이라고 누차 강조했다. 정치인과 자수.자복하는 기업인 등 간의 처벌 수위를 달리할 것임을 미리 밝혔다. 그러나 불이익을 당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기업인들이 수사에 협조하지 않자 그룹 총수들에 대한 사법처리 가능성을 내비치며 옥죄었다. 그 영향도 있었던지, 시간이 지나면서 자백하는 기업들이 늘어났다고 한다.

검찰은 한나라당이 당사를 국가에 헌납하면 이른바 '출구조사(사용처 조사)'를 하지 않는 빅딜 가능성을 시사, 법치주의에서 후퇴했다는 여론의 역풍을 맞기도 했다.

조강수 기자

<불법 대선자금 수사 일지>

2003.8~10=손길승 SK 회장 등 조사
10.16=최도술씨 구속
12.10=서정우씨 구속
12.14=안희정씨 구속
12.15=이회창 전 총재 검찰 자진 출두

2004.1.11=김영일 의원 구속
1.12=최돈웅 의원 구속
1.27~29=서청원 의원 등 4명 구속
4.8~5.17=이중근 부영 회장 등 기업인사법처리
5.19=이인제 의원 구속
5.20=김종필 전 자민련 총재 불구속 기소
5.21=최종 수사 결과 발표

*** 바로잡습니다

5월 22일자 4면 '불법 대선자금 관련 정치인 사법처리 현황' 표 가운데 나오연.황우여 의원, 양경자 전 의원 부분에서 '재판 중'을 '약식기소'로 바로잡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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