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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올림픽 30年·태권도 40年] 58. 애틀랜타 올림픽 (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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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애틀랜타 올림픽 개막식을 중계한 TV 화면. 개회사를 하는 클린턴 대통령 바로 뒤에 필자가 앉아 있다.

1996년은 근대 올림픽이 시작된 지 100주년이 되는 해였다. 100주년 올림픽은 고대 올림픽 발상지이자 제1회 근대 올림픽이 열렸던 그리스 아테네에서 개최해야 모양새가 좋다는 의견이 많았다. 그러나 아테네는 올림픽을 치를 준비가 거의 안 돼 있었고, 미국 애틀랜타가 적극적으로 달려들었다.

애틀랜타는 미국 육군보병학교가 있는 포트 베닝에서 불과 119마일 떨어져 있다. 나는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50년대 초반 군에 있을 때 학생과 교관 신분으로 두 차례나 포트 베닝에 간 적이 있다고 얘기한 바 있다. 이때 여러 번 애틀랜타를 갔었다. 조지아주 주도인 애틀랜타는 남북전쟁 때 남군의 중심지였으며,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작가 마가렛 미첼의 생가도 있다. 미첼 여사는 51년에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I OC 위원들이 애틀랜타를 시찰할 때 나는 가지 않았다. 애틀랜타에 대해 잘 알고 있을 뿐 아니라 당시 맡은 일이 많아서 갈 시간도 없었다. 그랬더니 애틀랜타의 잭슨 시장이 직접 서울로 찾아왔다. “IOC 위원들이 모두 애틀랜타에 왔는데 당신만 오지 않았다”고 했다. 오히려 내가 잭슨 시장 일행 10명을 오찬에 초대했다. 그 뒤 빌 페인 유치위원장도 서울에 왔다. 당시 그레그 주한 미국대사가 관저에서 연 오찬에 나를 초대해서 갔더니 페인 위원장이 있었다. 그는 애틀랜타 지지를 요청했다. 그런 노력 덕이었는지 90년 도쿄 IOC 총회에서 애틀랜타는 아테네 등 5개 도시를 따돌리고 96년 올림픽 개최권을 따냈다.

애틀랜타 올림픽 당시 나는 IOC 제1부위원장 겸 TV위원장이었다. 애틀랜타 올림픽의 미국 TV 방영권료는 4억5600만 달러였다. 일본 TV 방영권료 협상 땐 승강이가 있었다. 애틀랜타 올림픽 조직위에서 예산이 2억 달러 모자라니 그 만한 금액을 내놓으라고 하자 일본 측이 “2억 달러가 어디서 나온 수치냐” “너희가 우리와 예산을 상의했느냐”며 매우 흥분했다. 내가 중재에 나서 1억 달러 이상은 줄 수 없다는 일본의 희망대로 9950만 달러에 처리했다. 일본 TV 방영권료 계약식은 95년 6월 28일 도쿄 NHK 본사에서 열렸다. NHK 회장, NTV 회장, 필자, 애틀랜타 조직위의 프레이저 부회장이 서명했다.

96년 7월 19일 애틀랜타 올림픽이 개막됐다. 192개 국 1만7765명의 선수단이 참가해 26개 종목(428개 세부종목)에서 경쟁했다. 개회식에서 나는 빌 클린턴 대통령 부부 바로 뒷자리에 앉았다. 힐러리 클린턴 여사는 특별기를 보내 IOC 위원의 부인을 모두 백악관으로 초청, 대접하기도 했다.

개막식 성화 점화자는 복싱 영웅 무하마드 알리였다. 파킨슨씨병을 앓고 있는 알리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성화대에 점화했다. 남부 노예제도의 중심지였던 애틀랜타에서 알리가 점화자로 나선 것은 잔잔한 감동이었다.

김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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