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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문화·예술 올림픽이 남북 화해 다리 되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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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고대 그리스인이 펼친 제전엔 올림픽만 있는 게 아니었다. 문화·예술 분야를 겨루는 축제인 ‘델픽 대회’도 있었다. 기원전 6세기경부터 1000년간 계속되다 로마에 의해 명맥이 끊겼다. 독일인 크리스티안 키르슈(65·사진)가 델픽 대회를 부활시켰다. 내년 9월 제주도에서 제3회 대회가 열린다. 제주 대회 준비를 위해 한국을 찾은 키르슈를 만나 델픽 대회를 되살리기까지의 곡절을 들었다.

키르슈는 먼저 고운 한복을 꺼내 보이더니 “한국 전통문화에 대한 경의를 표하기 위해”라는 설명을 보태며 옷을 갈아입고 나왔다. “전통문화는 미래를 빚어가는 과거의 재료에요. 델픽 대회를 되살린 것도 문화를 보다 풍성하게 만들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델픽 대회는 곧 문화·예술 분야 올림픽입니다. 몸이 아닌 정신을 수련하는 올림픽인 셈이지요.”

키르슈는 본래 독일 금융인으로 문화·예술을 후원하는 일에 힘을 쏟았다. 본인도 대학에서 공예와 그래픽을 전공했지만 “예술만으론 생계를 꾸릴 수 없어” 금융업으로 방향을 틀었다. 예술에 대한 열정을 간직해오다 예술가 후원에 나섰고, 전세계가 문화와 예술을 테마로 모이는 축제를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품게 됐다.

여기엔 한국의 영향도 있었다고 귀띔한다. “한국 성악가나 클래식 연주자들의 약진을 보면서 전세계가 함께 축제를 벌이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는 것이다. 그러던 중 1984년 친분이 있던 대학교수로부터 “고대 그리스에 당신이 꿈꾸던 형태의 축제가 존재했다”는 얘기를 듣고 귀가 번쩍 뜨였다.

“바로 이거다 싶었어요. 피에르 쿠베르탱이 올림픽을 전세계인의 스포츠 축제로 부활시켰듯, 델픽 대회를 전지구적 문화축제로 만들자고 결심했지요.” 쉽진 않았다. 여러모로 궁리를 거듭하다 델픽 대회의 원류인 그리스 사람과 문화가 궁금해졌다. 문득 스페인 소피아 왕비가 그리스계라는 생각이 떠올랐고, 스페인 정부가 운영하는 문화원을 찾아갔다.

“무작정 문을 두드렸지요. 시도도 안 하고 포기할 수는 없잖아요.” 정성에 탄복한 스페인 문화원 관계자 주선으로 마침내 소피아 왕비를 만나 지지를 얻어냈다. 이 만남을 인연으로 그는 그리스 정부 자문 역으로 약 2년을 그리스에서 지냈다. 델픽 대회가 열렸던 극장을 찾아 밤을 지새기도 했다. 이후엔 각국 문화부 장관을 만나 지지를 호소했다. 그리고 94년 18개 국 대표들과 국제델픽위원회(IDC)를 결성하고 사무총장을 맡았다. 첫 대회는 2000년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두 번째 대회는 2005년 말레이시아에서 개최했다.

제주는 2006년 열린 국제델픽위원회 총회에서 인도 뉴델리와 경합 끝에 만장일치로 개최지로 결정됐다. 12일 출범한 제주세계델픽대회 조직위원회(위원장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를 중심으로 개최 준비를 본격화했다. 조직위는 24일 기자회견을 열고 제주 대회 주제를 ‘자연과의 조화’로 정했다고 발표했다. 음악·공연·공예·디자인 부문 등의 경연과 페스티벌을 진행할 계획이라고 덧붙였다.

키르슈는 제주 대회에 100여 개 국에서 3000명이 참가할 것으로 예상된다며 최대 규모의 델픽 대회가 될 것이라 기대했다. 그는 제주 대회가 분단국 한국에서 열린다는 점에서 더욱 특별하다고 강조했다. 북한 관계자들을 만나 “예술인을 보내는 것은 무리일지 몰라도 예술품들은 출품토록 하겠다”는 답변을 들었다. 분단의 아픔을 경험한 독일인으로서 마음을 쓴 부분이다. “정치적으로는 요원한 남북이지만 문화·예술로는 온기를 불어넣을 수 있을 겁니다. 델픽 대회가 남북 간에 다리를 놓을 수 있길 바랍니다.”

글=전수진 기자, 사진=권혁재 전문기자

◆세계델픽대회=음악·무용·시 등 예술을 관장하는 신이었던 아폴로에게 바치는 제전으로 기원전 6세기경 시작돼 기원후 394년까지 계속됐다. 아폴로신전이 있던 고대 그리스 도시 델피의 이름을 따라 ‘델픽 대회’라는 이름이 붙었다. 키르슈가 현대 델픽 대회를 부활시킨 후 1회 대회가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푸틴 당시 대통령의 후원으로 열렸다. 2회는 말레이시아 쿠칭에서 개최됐다. 성인 델픽 대회와 별도로 청소년 델픽 대회도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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